그분의 손녀딸 별명은 "빠끔"이다.

왜 하필이면 별명이 빠끔이가 됐는지 그 연원을 아는 사람은 우리들
조무래기 사이에 아무도 없었다.

어른들 모두가 그렇게 부르니까 따라서 부를 뿐이다.

느릿재 고개를 넘어가야 되는 초등학교 등교길 모퉁이에 "빠끔"이네 집이
있다.

우리들은 길가 한쪽의 남루하게 쓰러져가는 그 집앞을 지날 때마다
"썩큰이!"하며 빠끔할아버지의 이름(정석헌)을 심술궂게 불러댔다.

그때마다 예외없이 구부정한 몸집의 중노인이 성난 얼굴로 쫓아온다.

대님도 치지 않은 무명 바지자락, 매다만 저고리 고름, 까치머리, 어딘지
한없이 어리숙하여 보이는 몰골은 가히 볼거리여서 우리는 끼득끼득 웃음꽃을
피운 다음 달아나기 바빴다.

이 통과의례와도 같은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성난 그가 열걸음도 채 쫓아오지
않고 도중에 피식 장난기 어린 웃음으로 우리를 향해 면죄부를 던져주는
순간이다.

개구장이들의 행사는 계속됐지만 누구도 빠끔할아버지의 손에 잡혀 진짜
혼난 사람은 없었다.

우리들뿐만 아니라 잘난 동네 어른들에게도 빠끔할아버지는 유희의 대상
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허릿병 앓는 술주정뱅이 큰 아들의 노름빚을 갚기 위해
가진 전답 죄댜 팔고 가족들 끼니 때문에 남의 집 달머슴살이가 일쑤인
그가 보통 사람들 눈에 온전히 보일리 만무였다.

"썩큰이 금덩이라도 캐나"

눈만뜨면 논밭에 나가 쭈그리고 일만해대는 그를 향해 길가던 어른들은
손위나이에도 개의치 않고 반말로 빈정댔다.

주민등록증에 온전한 지문하난 못남겼을 정도로 손발이 부르트게 살아왔건만
언제나 머슴신세인 그에 대한 비아냥이련만 빠끔할아버지의 대답은 입가의
스쳐간 헤픈 웃음과 함께 "그려 그려"뿐이다.

동네를 휩쓸던 삼강오륜의 위세도 빠끔할아버지에게만은 예외였다.

그 빠끔할아버지가 우리집 달머슴으로 들어온 이래 아무것도 모르던 나와
동생은 더욱 희희낙낙했다.

"썩큰이!"

우리의 새디즘적 본능이 광기를 발할 때마다 영락없이 밥(?)이 된 그의
모습은 차라리 천사였다고 할까.

"예끼놈!"

"오냐 오냐"

늙은 그의 저항이 한없이 포근한 자장가처럼 우리의 강팍한 마음을 무력하게
만들었음을 안 것은 먼 훗날의 일이었다.

병든 큰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빠끔할아버지는 손자들 생계를 위해서 이후
에도 계속 달머슴으로 우리집을 들락거렸다.

내가 부모님께 호된 야단을 맞고 설움에 복받쳐 뒷동산 왕소나무 아래서
훌쩍일때면 영락없이 어기적 거리며 나타나 "이눔아, 울긴 왜 울어" 소리치며
슬며시 궐련을 권해 나를 결국 웃게 만들던 그였다.

우리의 관계는 엄청난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만만한 친구처럼 가까와졌다.

"썩큰이"에서 "빠끔할아버지"로 호칭이 바뀐 것도 아마 이 무렵이었으리라.

평생 애물단지라던 아들을 묻고 돌아오던 날 구부정한 중노인의 눈에
가득괴였던 물기는 지금도 나의 뇌리속에 남아 있다.

나는 얼마전 그 빠끔할아버지의 손자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에
다녀왔다.

빠끔할아버지처럼 순후한 웃음을 잃지 않고 어벙벙 서있는 손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다시 뭉클했던 유년시절의 그리움에 사무쳤다.

그날 한없이 각박한 내 삶의 한가운데 이미 고인이 된 빠끔할아버지의
모습이 가슴저리게 떠올랐던 이유는 무슨 까닭에서일까.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만이 판을 치는 찌들리고 삭막한 이 세상의 통렬한
어둠속에서 이제는 빛나고 아름다운 내 영혼의 별이 되어 나타나는
빠끔할아버지-.

빠끔할아버지는 지금 이세상 어디에도 없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