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어렵다.

모두 우려의 목소리만 높이고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대기업이 움추려 돌면 주변에 매달려 있던 중소 기업가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그들의 가족이 길에 나서고 그 속에서 일하던 근로자들이 직장을 잃는다.

우리 사회는 대기업이 잘 되어야 한다.

대기업이 건실한 거래 관계를 이끌면 기술 좋은 중소기업들이 부쩍
성장할 수 있다.

이런 저런 우여골절은 있었으나 과거 10여년 동안 많은 기업들이
성장하였다.

삼성, 현대, LG, 대우를 비롯한 대기업들이 차분하게 인제를 양성하고
기술을 축저하였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거품을 잔뜩 물고 앞뒤를 가리지 않는 정치가와
배짱군이 합작으로 만들어 낸 5조5천억의 부채, 그에 매달려 있던
중소기업들의 몰락, 그리고 대기업들의 움추려듦, 이것이 요즈음 우리
산업계의 현실인 것 같다.

정치가 경제를 이끌던 일이 터진다.

신문에는 온통 정치 이야기 뿐이다.

눈 앞에서 없어졌으면 하는 사람들 만의 이야기로 지면이 가득 찬다.

정치하는 사람들,그리고 정치가를 욕하면서 그들을 흉내내는 무리들도
어디 다른 곳에 가서 그들 끼리의 음모, 모략, 투쟁, 야심을 펼쳤으면
좋겠다.

하지만 뛴다고 하여서 되는 세상이 아니다.

배짱과 의지 만으로 기업을 운영되는 세상은 지났다.

기업은 거래 관계로 부터 부가가치를 창조하는 조직이다.

거래 관계는 서로 가치 있다고 판단한 상품과 서비스를 서로 인정하는
가격에 교환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정치적 강요가 없다.

그러자면 상대를 알아야 한다.

상대의 욕구를 알아야 그들이 원하는 물건을 만들 수 있고 내 물건에
대한 상대방의 태도를 알아야 내 물건의 값을 매갈 수 있다.

소비자를 알아야 한다.

수출을 하자면 해외 달러로서는 부족하다.

해외 소비자를 직접 알아야 한다.

최근 어는 식품회사에서 17개의 신제품 아이디어의 시장 타당성을
조사하였다.

요즈음 같이 앞이 안 보이는 시대에 신제품 계획을 하다니 용기 있는
기업이다.

그들은 그 중에서 5개의 신제품 아이디어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생산설비와 기술에 비추어 수입할 것과 생산할 것을
구분하였다.

시제품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실제 사용하도록 하여 보고, 그들의
구매의도를 과학적으로 조사하여 향후 2~3년 동안의 매출액을 예측한다.

그 예상 매출액과 개발비용 광고비용 영업비용을 견주어 3년 이내에
손익분기점을 이룰수 있는 제품들을 신제품으로 출시 한다는 계획이다.

적어도 1개 제품은 금년에 출시한다.

그 예상 매출액이 아주 작아도 보다 중요한 것은 매출이 아니라 3년
이내의 손익분기점 도달과 그후의 이윤이라는 것이다.

매출 증가욕이라는 거품을 없애고,기업의 궁극적 목적인 이윤을 판단의
기준으로 내리는 현명함이다.

서두르지 않으나 일정대로 진행하는 그 기업의 모습에서 기업가의
진지함을 느낀다.

요즈음 정치 세태에는 관심도 없다.

사채는 물론이고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기업,
기업 안에서 가용할 수 있는 자본 범위 내에서 투자를 한다.

히트 상품이 아니더라도 작은 이윤이 난다면 기업은 신제품을 내어야
하며 그래서 고용을 증대하여야 한다는 의무감을 그 기업의 책임자 얼굴에서
느낀다.

그러한 판단을 도와주는 것이 통제이다.

숫자이다.

배짱과 의지를 부리기 전에 숫자를 보고 확신을 가져야 한다.

일관성은 확신으로 부터 나올 것이다.

한보철강의 1조5천억 설비 계획이 어떻게 3년 만에 5조를 넘었을까?
정부는 국내및 세계 철강산업의 수급 예측을 어떻게 하였길래 3년 만에
세배의 시설 투자를 종용 내지 허가하였을까? 당초에 은행은 어떤 숫자를
보고 한보의 금융 회수 능력을 판단하였는가? 15년 전 일본의 한 시장조사
회사가 정부로 부터 전 세계 철강산업의 수급 전망을 요청받아 조사 한
적이 있다.

일본 정부는 그 조사결과를 참고로 (물론 많은 다른 정보와 함께)
철강산업에 대한 투자 방향을 대량 생산 설비에서 고급 제품 생산 설비로
바꾸었다.

이것이 정부의 역할일 것이다.

그 과정중 대출에 대한 외압, 대출금 일부의 정치자금화, 그런 것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기업가와 정부는 기업이 제대로 운영되고 이윤이
나도록 해서 국민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하여야 하지 않는가?

그래야 그 중에서 정치자금도 좀 쓰고, 투자자도 좀 혜택을 보는 것이지
요즈음 우리는 아예 기업은 안중에도 없고 서로 뜯어먹기 만하고 있는 것
같다.

한심하다.

떡과 고물이 바뀐 격이다.

떡고물이 떡보다 더 크다.

숫자를 보 야 할 때다.

대부분의 미국 기업들은 요약 보고서를 싫어한다.

구체적인 숫자를 가져오라는 것이다.

커다란 작은 숫자로 부터 시작된다.

경험과 통찰력이 뛰어난 기업가는 숫자를 볼줄 안다.

무엇이 중요한 숫자이고 무엇이 허구인지를 안다.

20년전 우리나라의 경제를 이끌었던 한 지도자도 숫자를 읽었다.

포항제철과 한보철강의 차이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