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 몰락] (6) 길고 긴 '운명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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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여신의 발생은 은행과 개인 모두에게 돌이킬수 없는 막대한 피해를
준다.
절대로 부실여신을 발생시키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와 각오아래 여신을
운용해 나가야 한다"
신광식 제일은행장은 신년사에서 누구보다 각별한 각오를 다졌다.
이미 유원건설(95년 4월 부도)에 치이고 우성건설(96년 1월)에 뜨겁게
데인 다음이었다.
어쩌면 한보만큼은 절대 부도가 나선 안된다는 속내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그에게 드디어 길고 긴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97년 1월23일.
그의 공식일정은 오전 7시부터 시작됐다.
비서진은 롯데호텔에서 개최될 한국능률협회초청 조찬회라고 연막을 쳤다.
수행비서도 대동하지 않고 갔다고 덧붙였다.
호텔롯데.
그러나 예정된 조찬회는 하나도 없었다.
물론 신행장도 없었다.
신행장은 이 시각에 한보처리를 위해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시내모처에서.
신행장이 은행에 돌아온 것은 8시30분께.
행장실에 들어가자 마자 그는 이세선 전무 박석태 상무 신중현 상무를
급히 불러모았다.
긴급회의가 진행됐다.
9시10분께.
신상무가 행장실을 빠져나갔다.
표정은 밝아보였다.
뭔가 일이 잘풀리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더구나 정태수 총회장도 밤새 태도를 바꿔 한보경영권을 포기하겠다고
밝힌 언론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취재진에겐 일제 함구였다.
누구하나 사태진전을 말하지 않았다.
비서실 직원들도 난감해했다.
출근하면서부터 무섭게 울려대는 외부전화가 겁났다.
"뭘 알아야지. 어떻게 돼가고 있는 겁니까"라고 되묻기도 했다.
취재진 사이에서도 간간이 불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디어 일은 벌어졌다.
9시30분.
비서진 말만 믿고 롯데호텔에서 헛고생했던 한 방송기자의 격렬한 항의가
터져나왔다.
쿵쿵.
분을 삭이지 못한듯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기도 했다.
소란은 약 20분가량 진행됐다.
10시10분 이전무가 모습을 나타냈다.
"뭐좀 새로 나온 것 있습니까"
자청 타청으로 기자간담회가 이뤄졌다.
"정회장이 오전 9시경 주식담보를 제공하겠다고 통보해왔다.
공장은 어떤 일이 있어도 완공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 틈에 박상무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전무는 같은 말을 내내 되풀이하며 시간을 질질 끌었다.
10시40분을 조금 지나고선 집무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취재진도 함께 따랐다.
그러는 사이 신행장이 황급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10시45분.
몇몇 기자들이 가로막았다.
"루머와 언론 때문에 일을 못하겠소"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고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질문이 이어졌지만 묵묵부답.
총총한 걸음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11시로 예정된 4개 은행장 모임에 참석키 위함이었다.
주식담보를 제공키로 했으니 향후 대책을 논의해보자는 것이었다.
12시.
제일은행 본점근처 한식집.
신행장은 이날 금융단 기자단과 오찬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신행장은 끝내 나타나지 않고 이전무가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오후들어선 제일은행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1시30분경 제일은행은 "오후 4시에 대표자회의를 소집한다"고 채권금융기관
들에 통보했다.
"선 은행관리-후 3자 인수방안"이 굳어지는 듯했다.
이전무가 다시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1시45분 무렵이었다.
오전과 다른 내용은 없었다.
또 신행장이 도망치듯 엘리베이터를 탔다.
박상무는 최남규 외환은행상무 손수일 산업은행부총재보 등 채권은행
여신담당상무와 긴급회의를 주재했다.
은행관리로 들어갈 경우 자금지원 등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주제였다.
신행장은 2시55분께 행장실로 돌아왔다.
면담은 일체 삼갔다.
외부와 통화하는 소리만 간혹 들렸다.
대표자회의를 위한 준비들이 착착 진행되는가 싶었다.
채권단 대표자회의가 열릴 4층 회의실.
4시가 임박하자 50여 채권금융기관 대표들이 줄줄이 모여들었다.
우찬목 조흥은행장 장명선 외환은행장 김시형 산업은행총재도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장 11층 은행장실로 향했다.
4시가 넘어서도 회의는 시작되지 않았다.
4시25분.
신행장이 회의실에 등장했다.
"주식담보 취득을 위한 절차가 완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표자회의를
무기연기한다" 일순간 채권단 대표들의 얼굴색이 달라졌다.
"이건 부도로 간다는 말 아니야..." 중얼거리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나왔다.
신행장은 이내 집무실로 갔고 4시35분부터 4개 은행장회의가 시작됐다.
5시가 조금 넘자 김종국 한보그룹 재정본부장이 007가방 두개를 들고
"행장을 뵈러왔다"며 들이닥쳤다.
나중에 이 가방안에는 정총회장이 그렇게도 마지막까지 내놓지 않았던
주식현물이 들어있었다는게 밝혀졌다.
행장실로 들어가고 20분이 흘렀을까.
김본부장은 사색이 돼서 나왔다.
그 와중에도 "주식현물은 갖고 왔지만 포기각서는 쓸수 없다는게 우리입장"
이라고 했다.
"설마 부도까지 내겠어"라는 배짱이 깔려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태는 완전히 기울었다.
5시30분께 청와대가 한보 부도를 공식 확인해준 것이다.
은행장들은 아랑곳않고 회의만을 계속했다.
7시35분.
드디어 회의가 끝났다.
행장실문이 열렸다.
4명의 은행장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신행장이 말문을 열었다.
"오래 기다리게해서 죄송합니다..."
신행장은 자신의 운명를 예감한듯 착잡한 표정으로 발표문을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바통은 검찰로 넘어갔다.
<이성태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5일자).
준다.
절대로 부실여신을 발생시키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와 각오아래 여신을
운용해 나가야 한다"
신광식 제일은행장은 신년사에서 누구보다 각별한 각오를 다졌다.
이미 유원건설(95년 4월 부도)에 치이고 우성건설(96년 1월)에 뜨겁게
데인 다음이었다.
어쩌면 한보만큼은 절대 부도가 나선 안된다는 속내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그에게 드디어 길고 긴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97년 1월23일.
그의 공식일정은 오전 7시부터 시작됐다.
비서진은 롯데호텔에서 개최될 한국능률협회초청 조찬회라고 연막을 쳤다.
수행비서도 대동하지 않고 갔다고 덧붙였다.
호텔롯데.
그러나 예정된 조찬회는 하나도 없었다.
물론 신행장도 없었다.
신행장은 이 시각에 한보처리를 위해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시내모처에서.
신행장이 은행에 돌아온 것은 8시30분께.
행장실에 들어가자 마자 그는 이세선 전무 박석태 상무 신중현 상무를
급히 불러모았다.
긴급회의가 진행됐다.
9시10분께.
신상무가 행장실을 빠져나갔다.
표정은 밝아보였다.
뭔가 일이 잘풀리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더구나 정태수 총회장도 밤새 태도를 바꿔 한보경영권을 포기하겠다고
밝힌 언론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취재진에겐 일제 함구였다.
누구하나 사태진전을 말하지 않았다.
비서실 직원들도 난감해했다.
출근하면서부터 무섭게 울려대는 외부전화가 겁났다.
"뭘 알아야지. 어떻게 돼가고 있는 겁니까"라고 되묻기도 했다.
취재진 사이에서도 간간이 불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디어 일은 벌어졌다.
9시30분.
비서진 말만 믿고 롯데호텔에서 헛고생했던 한 방송기자의 격렬한 항의가
터져나왔다.
쿵쿵.
분을 삭이지 못한듯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기도 했다.
소란은 약 20분가량 진행됐다.
10시10분 이전무가 모습을 나타냈다.
"뭐좀 새로 나온 것 있습니까"
자청 타청으로 기자간담회가 이뤄졌다.
"정회장이 오전 9시경 주식담보를 제공하겠다고 통보해왔다.
공장은 어떤 일이 있어도 완공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 틈에 박상무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전무는 같은 말을 내내 되풀이하며 시간을 질질 끌었다.
10시40분을 조금 지나고선 집무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취재진도 함께 따랐다.
그러는 사이 신행장이 황급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10시45분.
몇몇 기자들이 가로막았다.
"루머와 언론 때문에 일을 못하겠소"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고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질문이 이어졌지만 묵묵부답.
총총한 걸음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11시로 예정된 4개 은행장 모임에 참석키 위함이었다.
주식담보를 제공키로 했으니 향후 대책을 논의해보자는 것이었다.
12시.
제일은행 본점근처 한식집.
신행장은 이날 금융단 기자단과 오찬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신행장은 끝내 나타나지 않고 이전무가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오후들어선 제일은행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1시30분경 제일은행은 "오후 4시에 대표자회의를 소집한다"고 채권금융기관
들에 통보했다.
"선 은행관리-후 3자 인수방안"이 굳어지는 듯했다.
이전무가 다시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1시45분 무렵이었다.
오전과 다른 내용은 없었다.
또 신행장이 도망치듯 엘리베이터를 탔다.
박상무는 최남규 외환은행상무 손수일 산업은행부총재보 등 채권은행
여신담당상무와 긴급회의를 주재했다.
은행관리로 들어갈 경우 자금지원 등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주제였다.
신행장은 2시55분께 행장실로 돌아왔다.
면담은 일체 삼갔다.
외부와 통화하는 소리만 간혹 들렸다.
대표자회의를 위한 준비들이 착착 진행되는가 싶었다.
채권단 대표자회의가 열릴 4층 회의실.
4시가 임박하자 50여 채권금융기관 대표들이 줄줄이 모여들었다.
우찬목 조흥은행장 장명선 외환은행장 김시형 산업은행총재도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장 11층 은행장실로 향했다.
4시가 넘어서도 회의는 시작되지 않았다.
4시25분.
신행장이 회의실에 등장했다.
"주식담보 취득을 위한 절차가 완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표자회의를
무기연기한다" 일순간 채권단 대표들의 얼굴색이 달라졌다.
"이건 부도로 간다는 말 아니야..." 중얼거리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나왔다.
신행장은 이내 집무실로 갔고 4시35분부터 4개 은행장회의가 시작됐다.
5시가 조금 넘자 김종국 한보그룹 재정본부장이 007가방 두개를 들고
"행장을 뵈러왔다"며 들이닥쳤다.
나중에 이 가방안에는 정총회장이 그렇게도 마지막까지 내놓지 않았던
주식현물이 들어있었다는게 밝혀졌다.
행장실로 들어가고 20분이 흘렀을까.
김본부장은 사색이 돼서 나왔다.
그 와중에도 "주식현물은 갖고 왔지만 포기각서는 쓸수 없다는게 우리입장"
이라고 했다.
"설마 부도까지 내겠어"라는 배짱이 깔려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태는 완전히 기울었다.
5시30분께 청와대가 한보 부도를 공식 확인해준 것이다.
은행장들은 아랑곳않고 회의만을 계속했다.
7시35분.
드디어 회의가 끝났다.
행장실문이 열렸다.
4명의 은행장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신행장이 말문을 열었다.
"오래 기다리게해서 죄송합니다..."
신행장은 자신의 운명를 예감한듯 착잡한 표정으로 발표문을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바통은 검찰로 넘어갔다.
<이성태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