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너무 나를 가지고 놀지 말아라. 네가 잘 났고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냐? 나도 잘만 굴리면 내팔자도 이렇게 개같이 천하게만 살지
않을 수도 있어. 이 춤바람 센 아줌마, 그만 돌아가시죠?

그의 그러한 험악한 기분이 예민한 김영신 사장의 마음에 전달이 된다.

"축하의 밤을 그만 망쳐줬나봐. 이쯤에서 축하를 끝내실까요? 코치님?"

그녀는 상냥하게 그의 기분을 탐색하며 엉거주춤 멈춰선다.

그때야 지영웅은 이렇게 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반성하면서 그의 이성적인 계산속에 580의 숫자를 단 벤츠가 클로즈업으로
떠오른다.

그 색은 희한하게 고운 금빛이다.

그녀의 벤츠와 자기의 비앰더블류가 떠오르면서 그 차를 팔아야 할것
같은 서글픔에 이내 얼굴이 슬픔으로 얼룩진다.

그러한 그의 슬픔을 알길 없는 김영신은, "아까 생일 선물을 차에 두고
왔는데 돌아갈때 드릴게요. 좋은 것은 아니지만 정성이니 받아주면
감사하겠어요"

그러자 지영웅은 오늘은 공친 금요일이구나 하고 아쉬워 한다.

금요일을 특별히 매상을 올리는 날로 치부하고 있는 그로서는 아무래도
김영신이 돈으로 계산을 안 하고 실컷 발바닥이 닳도록 춤을 춰준 대가를
무슨 생일선물로 때울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사뭇 우울하다.

괜히 생일이라고 했나보다.

자기 차로 지영웅을 데리고간 김영신은 자니베르사체의 태양 마크가
있는 봉투에 든 선물을 공손히 그의 앞에 내민다.

역시 "물개의 여왕 박사장과 하루쯤 더 놀아줄 걸"하고 그는 심각하게
후회를 한다.

그의 그런 모습은 김영신의 예리한 센스에 너무나 날카롭게 전이된다.

그녀는 남달리 섬세한 여자였다.

"정말 즐거웠습니다. 생일선물을 갑자기 장만할 수가 없었어요. 그렇다고
현금을 봉투에 넣기도 우습구"

그녀의 말은 어디까지나 겸손하고 우아하다.

하긴 그렇지. 보물대감을 구경도 못하고 그 이상 바라는 내가 어리석지.
그는 이내 기분을 일신하면서, "사장님, 생일선물까지는 바라지 않았어예.
이렇게 기분좋게 논 것도 오랜만입니다"

이때 능글능글한 민사장이 그들에게로 달려온다.

진정 그들은 그가 반갑지 않다.

"이봐요, 지코치. 나 농담 아니유. 어느 인도어인지 알려주면 꼭
찾아갈게요. 우리집을 찾아주셔서 진정 감사합니다"

그 녀석은 재벌의 아들로 자랄때의 교만은 어느새 깡그리 버리고 진지한
사업가로 훈련이 되어 있다.

90도로 절을 하다가 민사장은 지코치가 탄 차가 자기의 외사촌 여동생
권옥경이가 탔던 비앰더블류의 번호임을 기억해내고는 아리송한 충격을
받는다.

그 번호는 네자리가 홀수였다.

즉 그런 정도의 차를 가지려면 돈깨나 있는 집 아들이 재수에 재수를
거듭하다가 골프코치가 된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자기가 한번 유혹해보려던 계획은 도로아미타불이구나 하면서
크게 실망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