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위기 경제위기 도덕성위기 환경위기 아이덴티티(정체성)위기.

우리의 해방 이후 역사는 이런 위기들의 연속과 순환이었다.

신문과 방송매체는 주기적으로 이런 막다른 위기의 벼랑 끝으로 우리를
밀어부쳐 왔다.

하기야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민족사는 위기 특히 안보위기의 연속이었다.

역사를 상고하건대, 조선은 자신이 속한 명문권의 구심력과 원심력의 크기
에 따라서 평화와 위기가 교체되었다.

한 무제, 수 양제, 당 태종, 윤 세조, 청 태종, 일본의 풍신수길과 명치,
이들은 모두 동아시아 문명권의 거대한 구심력이었으며, 그 결과 조선은
이들 구심력이 자신을 향해서 움직일 때마다 국가가 존망과 위기를 경험했다.

그러나 조선은 이 절대절명의 위기를 극복함으로써 역사의 고난속에서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해 왔다.

바깥에서 지쳐들어오는 이러한 힘의 위기들을 극복한 이 민족에게 역사는
백성이 주인이 된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위기극복을 강요하고 있다.

외환이 아니라 내우라는 태생적, 근본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위기극복의
강요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매스커뮤니케이션에 등장하는 지금의 위기의 특성을 안보와 경제라는
복수중첩의 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그것은 가속도가 붙어 사회와 그 구성원들을 심리적 공황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지금의 현실이 이럴진대, 북한이라는 단순 변수만이 적용되는 안보위기를
제거하고 경제위기만을 변수로 한다면 나는 다시 한번 오늘날의 국제적
구심력을 생각하게 된다.

경제에 대해서 문외한인 나에게 대중매체와 전문가들이 전달하는 한국의
경제위기는 전문가들이 전달하는 한국의 경제위기는 상당 부분 일본의 몫이
좌우한다는 것이다.

특히 수출주도의 한국경제는 일본 돈의 가치에 의해서 영욕의 터널을
통과하는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우리의 현실이 슬픈 것은 봉건시대의 그들의 힘과 자본주의 시대의
일본 돈의 힘이 우리에게 작용할 경우 서로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일본 돈의 힘이 약해질수록 수출위주의 우리 경제는 더욱 가뿐 숨을 몰아쉴
수밖에 없다니..

언제까지 바깥의 힘이 이 나라의 명운과 진로에 장애가 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나는 우리의 역사의 거울상과 현재의 실상을 구별하고 싶은 간절한
유혹을 느낀다.

실상이 위기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극복이 가능한 것이며 어떤 측면에서는
다분히 심리적 상징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의 위기, 특히 군사정권의 끊임없는 안보위기 조성은 북한의
남침과 실질적 무력위협에 의해서 증폭되었다.

그리고 경제발전과 더불어 경제위기 또한 주기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경제발전은 무제한적인 자본주의의 파렴치한 욕망이 작용함으로써 한편
으로는 환경위기를 생산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성의 위기를 낳았다.

이 모든 위기의 복합체가 바로 정체성의 위기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들 위기는 언어의 상징화에 의해서 즉 지배
이데올로기의 힘에 의해서 확대재생산된 것이 사실이다.

과거의 안보적 위기는 우리의 의지와 힘의 바깥에서 온 것이되 현재의
경제적 위기는 우리의 의지와 힘으로써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20여년 전의 우리의 경제현실이 어떠했는가를 기업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위기" 운운하는 오늘의 우리를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경제위기라는 언어의 폭력적 상징을 내치고 실사구시의 정신적 바탕 위에서
생산적 사고를 해야 한다.

언어의 상징적 폭력에 압도된 정신의 공황은 결국 힘의 진공상태를 초래
한다.

이 징공에는 바깥의 힘이 필연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언어의 상징화에 의해서 이 사회의 한 특징이 된 "위기문화"의 비극은
현실직시의 겸허한 마음 곧 항심이 곧추 서 있을 때만이 극복되리라는 것이
나의 소박한 믿음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