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완식 <한화에너지 사장>

우리는 요즘 세기말적 현상을 맞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우려하는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것은 사회 질서와
가치체계의 공백이 발생하여 혼란이 가중될 수도 있다는 예감 때문이다.

아끼고 절약하는 저축정신, 혼신을 다해 땀흘려 일하는 개척자 정신
등은 점차 모습을 감추어가고, 그 대신에 좀더 좋은 것을 먹고 마시며, 좀더
좋은 차를 타고, 좀더 넓은 아파트에 살고자 하는 소비 향락 우선으로
가치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본격적인 저성장 시기에 접어든 우리나라의
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극적인 희생을 가로막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내일 당장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한 스피노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인 것 같다.

지금 세기말을 맞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과나무를 심는
지혜이다.

심는자는 그 결실을 보지 못할지 모른다.

오직 그에게는 나무를 심는 노력과 양분을 주고 보살피는 희생으로
족하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장래의 어떤 사람이 사과열매를 추수하는 기쁨을
누릴 것을 생각하며 인내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에 과실을 얻으려는 성급한 마음이 앞선다면 차분하게
나무를 심을 여유가 없다.

오직 사과나무에 달린 열매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 열중하게 된다.

또한 열매는 제한되어 있기 마련이고 이를 차지한자와 그렇지 못한자로
분열되어 불화와 불만족이 사회에 팽배해 진다.

국가 경쟁력 회복과 경제살리기가 최대 현안이 되고 있다.

긴급한 사항일수록 즉각 효과가 나타나는 정책에 대한 유혹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당장에 사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쉽게 뿌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근시안적 정책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경제를 당장 살려낼 수 있는 마술과 같은 묘책은 없다.

인내하며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지혜를 배우자.

마음을 비우고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정성껏 심어보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