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곳마다 실명제 토론이 한창이다.

극단적 견해로는 실명제는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경제문제의 뿌리요
만악의 근원이다.

기업인들의 의욕을 꺾는 것도 실명제요 과소비를 부추기는 것도 실명제다.

자금의 해외유출이나 증시의 침몰도 실명제 때문이라는 주장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대만과 일본을 예로 드는 소위 국제비교론이 나와있고 아시아인들이
현금성 재산에 대해 갖고 있는 전통적 관념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비교문화론도 한자락을 깔고 있다.

물론 모두가 "부분의 진실"은 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경제의 모든 문제가 그렇게 단순 명쾌한 하나의 원인으로
귀착될까 하는 것은 의문이다.

돌아보면 3년전 실명제 도입 당시에도 그랬었다.

실명제가 되면 재정은 풍부해지고 부자들이 세금을 많이 내는 만큼 서민의
세금은 줄어들 것으로 주장됐었다.

부조리와 부정이 근절되고 경제 민주화가 금방 달성될 것처럼 주장되고
또 생각되었었다.

당시로서는 "마법의 지팡이"였다.

지금 실명제 완화 또는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궁극적인
병인으로 실명제를 거론하듯이 당시에는 경제문제에 대한 유일하고도
본질적인 처방으로 실명제가 제시됐었다.

물론 지난 3년의 결과는 마법과는 거리가 멀었다.

까다로운 절차만이 새로 생겼을 뿐 낡은 금융 관행은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다 ''약간''의 부작용은 끝도없이 과장돼 경제난의 주범이 돼버렸다.

마치 16세기 유럽에 몰아쳤던 마녀사냥 광풍처럼...

마녀사냥이 실은 허망한 인간 사냥이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희생이
너무도 컸다.

실명제는 지금 경제를 망친다는 바로 그 마녀가 되어 있다.

마녀 사냥이 무너진 교권에 대한 반발이었다면 실명제는 무너진 경제가
요구하는 희생양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실명제가 폐지되면 과연 그것 때문에 경제가 살아날 것인가.

앞으로 다시 3년이 지나 오늘의 실명제 두들겨 잡기가 마녀사냥으로 평가
받지 않을지 두고볼 일이다.

정규재 < 경제부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