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년간 우리나라는 여러 분야에서 겉과 속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는가를 보여줘 왔다.

그 동안 국가경영을 주도해 왔던 지도층 자신들이 이루어 낸 성공적인
성과를 거론할 때면 되뇌어오던 "문민"이라는 것도, "민주"라는 것도
우리들이 알고 있는 상식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사회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의 뜻을 모아 합의된 의견을 도출해 내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의사결정의 공감대를 이루어 내는 제도적 아름다움도,
권력의 방만함을 방지하기 위해 권력을 분산하는 형태의 사회구조도 역시
무시되기는 마찬가지 였다.

더구나 올해 들어서 언론매체들이 쏟아내는 극단적인 언어들은 마치
1930년대 대공황으로 신음하던 당시의 미국 신문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한마디로 국민의 의식수준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무시해도 너무나
철저하게 무시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저 하라는 대로만 하고,따라오라는 대로만 따라오라는 독선과 오만함
만이 피부로 느껴질 뿐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상황을 절망적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소수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과거에도 우리가 독재타도라는
명분아래 했던 일들이 직금 우리가 하는 일들과 무척 닮은 꼴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과거에 비해 발전되었다는 자부심도, 아니면 발전을 위해
나아갈 출발점에라도 서있다는 최소한의 위안도 얻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지난 몇년동안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어 왔던 우리사회의 변화를
살펴보면 대부분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당면과제에 대한 올바른
접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설픈 시험답안지를 대하는 듯한 미완성의
느낌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개혁 시리즈의 속편은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 듯하다.

금융개혁이니 정치개혁이니 하는 얘기들이 들려오기 때문이다.

금융개혁만 해도 금융계 변화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정부주도하의 성장전략을 운용해오다 보니까 금융을 하나의 자금조달
창구로, 그리고 정부가 지시하는 부문에의 지출을 수행하는 또다른 창구로
지극히 제한적인 역할만을 수행해왔던 금융이 합리성을 바탕으로 본래의
기능으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개혁이라는 타이틀만 붙여주면 그렇게 간단히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개혁이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고의 발상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개혁은 인위적인 것이다.

우리 사회가 그렇게까지 여러개의 인위적인 흐름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사회의 흐름은 누구도 단절시킬 수 없는 것이고,
정책이라는 것도 그저 사회가 추구하는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 갈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이 그 기본적 기능이다.

사회적 흐름을 인위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하더라도 방향이 옳지 않으면
그 흐름은 언제든지 바뀔 수밖에 없게 마련이다.

운전을 할 때 급 커브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른쪽으로 급 커브를 틀면
왼쪽으로 급 커브를 틀어야할 때가 반드시 오게 마련이다.

사회적 흐름에 반하는 개혁은 거친 운전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개혁은 필요한 것이며 이는 사회구성원 대다수의 뜻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판단과 가치기준을 전제로 하지 않은 개혁은 또다른
개혁이 필요할 뿐이다.

개혁은 우리가 하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공황에 이르는 지금길이 비경제적 논리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것같아 몹시 불안할 뿐이다.

적어도 국가경제가 그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 것만 같다.

왜냐 하면 모든 거시경제지표가 거꾸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올라가야 할것은 내려가고 내려가야 할것은 올라가고, 정치는 경제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분야의 힘을 집약하고, 효율을 높여주도록 해야 한다.

그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정치는 우리 사회에 빚만지게 되는 것이다.

개혁은 하자.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인위적인 힘에 의해서 이루어져서는 안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