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열전] (12) 절재 김종서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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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이 아무리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해서 백가지 이치에 통달한
영명한 군주라 해도 역시 사람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젊은 날 혈기방장할 때는 오직 성리학적 이상국가 건설의 꿈을 실현해야
한다는 한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에 배치되는 일이라면 배치된다는
한가지 이유 때문에 이를 가차없이 제거해 나갔고 그런 일에서 성군으로서의
자부심을 확인했다.
그런 과정에서 성리학에서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는 불교를 혹독하게 박해
해 그 존립기반을 허물어 버렸다.
삼국시대 이래 1천여년 동안 전국에 세워진 수만 곳의 사찰을 이미 태종
6년(1406)에 2백32개소만 남기고 모두 혁파해 버렸는데, 세종은 그때 남겨진
11종파의 잔존 사찰마저 세종 6년(1424)에 모두 혁파해 버리고 11종파를
선종과 교종 양종으로 통폐합시켜 36개소의 사찰만을 그에 예속시키며 그
사찰들이 가진 토지와 노비 외에는 모두 국가에서 몰수하고 불교를 관장하던
관청인 승록사를 폐지했던 것이다.
이때 세종은 주자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합리주의를 절대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는 현실의 길흉화복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허망한 가르침이라는 오만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종 나이 45세의 장년기에 접어들었을때 세자빈 안동 권씨가
왕세손을 출산하다가 젊은 나이에 허무하게 죽어가는 것을 접하면서부터
인생 무상을 절감하기 시작하여 점차 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48세 때인 세종 26년(1444) 12월 8일 다섯째 아드님 광평대군(20)을 불의의
사고로 여의고 다음해 1월 16일에 일곱째 아드님 평원대군(19)을 천연두로
잃게 되면서부터는 불교에 깊이 젖어들어 간다.
그래서 50세 때인 세종 28년 3월 10일 왕비 청송 심씨가 병이 나자 신불
에게 기도하게 하고 병환이 위독해지자 승려를 불러들여 철야 정근과 연비
참회 등의 법석을 베풀어 왕비의 쾌유를 부처님께 기원한다.
이제서야 세종은 인간적인 한계를 통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난 날 젊은 패기로 자기이념에 도취되어 불교를 허망한 가르침
으로 매도하고 지나치게 박해하였던 것을 후회라도 하듯 왕비가 돌아가자
바로 사경불사를 베풀어 추선공양(돌아간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해 드리는
공양)을 감행하게 한다.
명색은 왕세자와 수양, 안평 등 여러 대군들이 모후의 추선공양을 위해
베푸는 불사라 하지만 이는 세종의 지극한 귀불의지였다.
이에 세종은 이 불사의 원만성취를 위해 유신들의 반대를 무마할 필요가
있으므로 우선 자신의 뜻을 잘 헤아리는 김종서를 국장도감의 실무책임자인
제조로 임명하고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하연을 국장도감 도제조로 임명하여
상징적인 책임을 담당하게 한다.
그리고나서 이들 의정부 대신들을 불러 사경불사의 가부를 물으니 동궁과
제대군들의 효성이라는데 차마 이를 반대할 수 없어 모두 해도 좋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3월 26일에 세종은 승정원에 이 사실을 통보하여 정효강이 불교를
좋아하고 재주와 행실이 바르다 하니 그 임무를 맡기려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태종때 변계량(1369~1430)이 불교를 좋아하면서 아닌척 하다가
태종에게 발각되었던 옛일을 회고하며 불교를 배척하는 부류가 세 종류인데
정자나 주자와 같이 진정으로 그 그릇됨을 알고 배척하는 부류와 정자나
주자와 같은 선유들이 나쁘다고 하였기 때문에 무조건 좋아하지 않는 부류와
사실 자기는 좋아하면서 남이 좋아하는 것을 나쁘다고 하는 부류라고 지적
하고 맨 끝의 부류를 세종 자신은 제일 미워한다고 말하여 그런 부류들은
반대할 엄두도 내지 말라는 엄포의 뜻을 비쳐 보인다.
그러나 승정원의 승지들은 즉각 이의 철회를 요청하며 왕비가 위독하였을
때 내전에서 정근기도를 행한 것은 사세가 급박하여 차마 말리지 못했지만
사경불사만은 안된다고 한다.
만약 부처가 영험이 있다면 왕비가 돌아갔겠느냐는 것이다.
화가 난 세종은 너희 중에 부모를 위해 불사를 하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고 꾸짖으며 너희들은 밝게 의리를 아는데 나만 도리를 모르는
사람이니 의논한 것이 잘못이라고 하는 말로 그 가소로움을 힐책한다.
그리고 내친 김에 사간원과 사헌부 집현전에 연락하여 사간 변효경, 집의
정창손(1402~78),교리 하위지 등을 불러서 이 뜻을 전하니 정창손과 하위지
가 이의 중지를 극력 간청한다.
세종은 정창손이 예조판서 정갑손의 아우이니 앞장서서 반대하지는 않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욱 기승하여 반대하는 것을 보고 내심 괘씸하게 생각
한다.
정갑손의 장녀가 세자의 후궁으로 들어와 있어 정창손은 세자의 처삼촌이
되는 셈인데 안사돈의 상사에 추선공양 올리는 일을 앞장서서 반대하고
나서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정갑손과 정창손은 세종이 신임하여 일찍이 김종서에게 함길도 도절제사를
맡기어 북변을 개척할때 함길도 감사를 시켰었던 정흠지(1378~1439)의
아들들이었다.
이에 세종은 형제들에게서 실망하고 정갑손을 예조판서로 두어 심왕후의
장사를 치르게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임명한지 불과 석달만에 정인지
로 교체하게 되는 것이다.
드디어 세종은 3월 28일에 집현전 수찬 이영서(?~1450)와 돈령부 주부
강희안(1418~65)등 명필로 소문난 문사들에게 명하여 안평대군이 양자로
가 있는 성녕대군 저택에서 금자로 불경을 써내게 한다.
이 일은 안평대군의 사촌 처남이며 불교 좋아하기로 소문난 인순부 소윤
정효강이 주간해 나가도록 하였다.
강희안은 돌아간 심왕후 여동생의 장남이었으니 세종대왕의 이질이었다.
사경불사가 원만하게 진행되어 10월 15일에 성녕대군의 원찰인 고양 대자암
에서 전경법회(사경이 끝나면 경전을 돌려가며 펼쳐보는 의식을 치르는데
이를 전경법회라 한다)를 성대하게 치르기로 하니 10월 4일에 우찬성
자리에 있는 정갑손이 이 불사의 중지를 강력하게 요구하며 의정부의 의견을
대표하는 것이라 한다.
세종은 이를 몹시 불쾌하게 여기고 이미 사경을 시작할 때 대신들이 해도
좋다고 해서 시작한 일인데 이제 다 이루어져서 펴보는 의식을 거행하려는데
이를 중지하라는 것이 이치에 맞는 소리냐며 정갑손을 크게 꾸짖고 우의정
하연이 앞뒤 주장을 달리하여 허물을 임금에게 돌리려 한다고 질책한다.
그러자 하연은 이제 불경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어찌 펼쳐보이지 않겠느냐며
반대 의견을 철회한다.
그리고 나서 흉년이 계속되고 있으니 소규모로 잠시동안만 베풀었으면
좋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한다.
이때 세종의 깊은 뜻을 잘 헤아리고 있던 김종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
세종이 뜻대로 할 것을 당당하게 주장한다.
"신은 작위가 이미 극에 이르렀고 성은이 지극히 두터우니 다시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감히 부풀리는 말로 명예를 낚시질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노신을 좌우에 두셨으므로 불의를 보고 차마 입 다물고 있을 수가
없어서 예감(임금의 밝은 식견)을 번거롭게 할 뿐입니다. 오직 위에서
헤아려 실행하실 뿐입니다"
얼핏 보면 세종에게 김종서만 아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 시류에
편승하여 명예를 과시하기 위해 자신을 위장하거나 용기가 없어 자신의
뜻을 제대로 피력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을 얼마든지 불리하게 만들 수
있는 이런 말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은 김종서가 얼마만큼 세종에게
충성스런 신하였던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그래서 세종은 김종서를 그렇게 믿고 의지하였을 것이다.
김종서의 이런 기탄없는 직언에 의정부 대신들이 의표를 찔리어 더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자 세종은 이 기회에 불사 규모를 가지고 시비하는
것조차 봉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중 30~40명을 모으고자 하는데 이는 매우 간략한 것이다. 하지
않으려면 그만이겠지만 그것을 한다면 어찌 다시 줄이겠는가. 비록 중의
수효를 줄인다 하더라도 내 덕에 무엇이 드러남이 있겠는가. 또 누가 능히
간하여 이것을 그치게 하였다고 하겠는가. 그것을 다시 말하지 말라"
그러나 시류에 영합하려는 무리들이 어찌 명예를 떨칠 기회를 놓치겠는가.
사헌부 장령 강진이 다음날인 10월 6일 두차례에 걸쳐 중지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그 다음 7일에는 사간원 좌정언 윤배가 다시 불사를 정지
하라고 상소하며 10월 9일에는 정창손이 다시 장문의 상소를 올려 불사
중지를 간청하는데 "일문이 모두 도륙된다 해도 직분을 다하지 못한 죄를
막지 못한다"느니 "천만세 후에 역대 호불하던 임금과 같이 역사에
남으리라"는 등의 불손한 언사를 기탄없이 구사한다.
이에 애초부터 정창손을 괘씸하게 보고 있던 세종은 간사하게 말을 꾸며
임금을 속이는 자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크게 꾸짖고 정창손과 강진
등을 의금부에 하옥하고 좌부승지 이사철(1405~56)로 하여금 국문하게 한다.
그러자 직제학 이계전(1404~59)을 비롯한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이
언론을 맡은 관리들이 말을 잘못했다 하여 벌을 주면 언로가 막히니 풀어
달라고 주청하니 세종은 못이기는 척하며 수양대군을 시켜 이들을 풀어주게
하는데 정창손과 강진만은 용서하지 않는다.
정창손은 근시의 직임을 거치고 단정한 선비의 이름을 얻은 자인데도 남보다
늦게 반대했다는 혐의를 살까봐 조회하는 날 각 사 관리가 불사에 쓰일
물건을 대느라고 조회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보고 장차 대자암에서 불사를
베푼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등 거짓말을 꾸며 대었다는 것이다.
간사하고 불초한 소인배이니 장차 어떤 짓을 못할까보냐 면서 몇달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끝까지 추궁하여 실정을 밝히겠다고 다짐한다.
과연 세종은 사람을 정확히 알아보는 지인지감을 타고 났었던가 보다.
정창손이 뒷날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을 복위시키려 했을
때 이를 고변하여 수많은 충의지사들과 세종이 그렇게도 사랑하던 왕세손
단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장본인이었으니 말이다.
이떻든 세종은 10월 15일에 대자암에서 돌아간 왕비를 위해 전경법회를
크게 베푸는데 승려 1천여명이 모여 7일 밤낮을 계속하였다 한다.
떡과 엿 과자 음식 등이 산같이 쌓이고 주옥으로 정교하게 등을 만들어
장엄하였으며 금자.은자 사경의 경집은 황금으로 용을 그려 장식하였다 한다.
왕세자와 대군 제군 등 왕실 종친과 내외명부 등이 참예하는 큰 불사였으니
그 성대한 규모가 어떠하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대자암은 지금 벽제 조금 지나 대자리에 있었던 절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21일자).
영명한 군주라 해도 역시 사람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젊은 날 혈기방장할 때는 오직 성리학적 이상국가 건설의 꿈을 실현해야
한다는 한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에 배치되는 일이라면 배치된다는
한가지 이유 때문에 이를 가차없이 제거해 나갔고 그런 일에서 성군으로서의
자부심을 확인했다.
그런 과정에서 성리학에서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는 불교를 혹독하게 박해
해 그 존립기반을 허물어 버렸다.
삼국시대 이래 1천여년 동안 전국에 세워진 수만 곳의 사찰을 이미 태종
6년(1406)에 2백32개소만 남기고 모두 혁파해 버렸는데, 세종은 그때 남겨진
11종파의 잔존 사찰마저 세종 6년(1424)에 모두 혁파해 버리고 11종파를
선종과 교종 양종으로 통폐합시켜 36개소의 사찰만을 그에 예속시키며 그
사찰들이 가진 토지와 노비 외에는 모두 국가에서 몰수하고 불교를 관장하던
관청인 승록사를 폐지했던 것이다.
이때 세종은 주자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합리주의를 절대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는 현실의 길흉화복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허망한 가르침이라는 오만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종 나이 45세의 장년기에 접어들었을때 세자빈 안동 권씨가
왕세손을 출산하다가 젊은 나이에 허무하게 죽어가는 것을 접하면서부터
인생 무상을 절감하기 시작하여 점차 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48세 때인 세종 26년(1444) 12월 8일 다섯째 아드님 광평대군(20)을 불의의
사고로 여의고 다음해 1월 16일에 일곱째 아드님 평원대군(19)을 천연두로
잃게 되면서부터는 불교에 깊이 젖어들어 간다.
그래서 50세 때인 세종 28년 3월 10일 왕비 청송 심씨가 병이 나자 신불
에게 기도하게 하고 병환이 위독해지자 승려를 불러들여 철야 정근과 연비
참회 등의 법석을 베풀어 왕비의 쾌유를 부처님께 기원한다.
이제서야 세종은 인간적인 한계를 통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난 날 젊은 패기로 자기이념에 도취되어 불교를 허망한 가르침
으로 매도하고 지나치게 박해하였던 것을 후회라도 하듯 왕비가 돌아가자
바로 사경불사를 베풀어 추선공양(돌아간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해 드리는
공양)을 감행하게 한다.
명색은 왕세자와 수양, 안평 등 여러 대군들이 모후의 추선공양을 위해
베푸는 불사라 하지만 이는 세종의 지극한 귀불의지였다.
이에 세종은 이 불사의 원만성취를 위해 유신들의 반대를 무마할 필요가
있으므로 우선 자신의 뜻을 잘 헤아리는 김종서를 국장도감의 실무책임자인
제조로 임명하고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하연을 국장도감 도제조로 임명하여
상징적인 책임을 담당하게 한다.
그리고나서 이들 의정부 대신들을 불러 사경불사의 가부를 물으니 동궁과
제대군들의 효성이라는데 차마 이를 반대할 수 없어 모두 해도 좋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3월 26일에 세종은 승정원에 이 사실을 통보하여 정효강이 불교를
좋아하고 재주와 행실이 바르다 하니 그 임무를 맡기려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태종때 변계량(1369~1430)이 불교를 좋아하면서 아닌척 하다가
태종에게 발각되었던 옛일을 회고하며 불교를 배척하는 부류가 세 종류인데
정자나 주자와 같이 진정으로 그 그릇됨을 알고 배척하는 부류와 정자나
주자와 같은 선유들이 나쁘다고 하였기 때문에 무조건 좋아하지 않는 부류와
사실 자기는 좋아하면서 남이 좋아하는 것을 나쁘다고 하는 부류라고 지적
하고 맨 끝의 부류를 세종 자신은 제일 미워한다고 말하여 그런 부류들은
반대할 엄두도 내지 말라는 엄포의 뜻을 비쳐 보인다.
그러나 승정원의 승지들은 즉각 이의 철회를 요청하며 왕비가 위독하였을
때 내전에서 정근기도를 행한 것은 사세가 급박하여 차마 말리지 못했지만
사경불사만은 안된다고 한다.
만약 부처가 영험이 있다면 왕비가 돌아갔겠느냐는 것이다.
화가 난 세종은 너희 중에 부모를 위해 불사를 하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고 꾸짖으며 너희들은 밝게 의리를 아는데 나만 도리를 모르는
사람이니 의논한 것이 잘못이라고 하는 말로 그 가소로움을 힐책한다.
그리고 내친 김에 사간원과 사헌부 집현전에 연락하여 사간 변효경, 집의
정창손(1402~78),교리 하위지 등을 불러서 이 뜻을 전하니 정창손과 하위지
가 이의 중지를 극력 간청한다.
세종은 정창손이 예조판서 정갑손의 아우이니 앞장서서 반대하지는 않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욱 기승하여 반대하는 것을 보고 내심 괘씸하게 생각
한다.
정갑손의 장녀가 세자의 후궁으로 들어와 있어 정창손은 세자의 처삼촌이
되는 셈인데 안사돈의 상사에 추선공양 올리는 일을 앞장서서 반대하고
나서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정갑손과 정창손은 세종이 신임하여 일찍이 김종서에게 함길도 도절제사를
맡기어 북변을 개척할때 함길도 감사를 시켰었던 정흠지(1378~1439)의
아들들이었다.
이에 세종은 형제들에게서 실망하고 정갑손을 예조판서로 두어 심왕후의
장사를 치르게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임명한지 불과 석달만에 정인지
로 교체하게 되는 것이다.
드디어 세종은 3월 28일에 집현전 수찬 이영서(?~1450)와 돈령부 주부
강희안(1418~65)등 명필로 소문난 문사들에게 명하여 안평대군이 양자로
가 있는 성녕대군 저택에서 금자로 불경을 써내게 한다.
이 일은 안평대군의 사촌 처남이며 불교 좋아하기로 소문난 인순부 소윤
정효강이 주간해 나가도록 하였다.
강희안은 돌아간 심왕후 여동생의 장남이었으니 세종대왕의 이질이었다.
사경불사가 원만하게 진행되어 10월 15일에 성녕대군의 원찰인 고양 대자암
에서 전경법회(사경이 끝나면 경전을 돌려가며 펼쳐보는 의식을 치르는데
이를 전경법회라 한다)를 성대하게 치르기로 하니 10월 4일에 우찬성
자리에 있는 정갑손이 이 불사의 중지를 강력하게 요구하며 의정부의 의견을
대표하는 것이라 한다.
세종은 이를 몹시 불쾌하게 여기고 이미 사경을 시작할 때 대신들이 해도
좋다고 해서 시작한 일인데 이제 다 이루어져서 펴보는 의식을 거행하려는데
이를 중지하라는 것이 이치에 맞는 소리냐며 정갑손을 크게 꾸짖고 우의정
하연이 앞뒤 주장을 달리하여 허물을 임금에게 돌리려 한다고 질책한다.
그러자 하연은 이제 불경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어찌 펼쳐보이지 않겠느냐며
반대 의견을 철회한다.
그리고 나서 흉년이 계속되고 있으니 소규모로 잠시동안만 베풀었으면
좋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한다.
이때 세종의 깊은 뜻을 잘 헤아리고 있던 김종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
세종이 뜻대로 할 것을 당당하게 주장한다.
"신은 작위가 이미 극에 이르렀고 성은이 지극히 두터우니 다시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감히 부풀리는 말로 명예를 낚시질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노신을 좌우에 두셨으므로 불의를 보고 차마 입 다물고 있을 수가
없어서 예감(임금의 밝은 식견)을 번거롭게 할 뿐입니다. 오직 위에서
헤아려 실행하실 뿐입니다"
얼핏 보면 세종에게 김종서만 아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 시류에
편승하여 명예를 과시하기 위해 자신을 위장하거나 용기가 없어 자신의
뜻을 제대로 피력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을 얼마든지 불리하게 만들 수
있는 이런 말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은 김종서가 얼마만큼 세종에게
충성스런 신하였던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그래서 세종은 김종서를 그렇게 믿고 의지하였을 것이다.
김종서의 이런 기탄없는 직언에 의정부 대신들이 의표를 찔리어 더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자 세종은 이 기회에 불사 규모를 가지고 시비하는
것조차 봉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중 30~40명을 모으고자 하는데 이는 매우 간략한 것이다. 하지
않으려면 그만이겠지만 그것을 한다면 어찌 다시 줄이겠는가. 비록 중의
수효를 줄인다 하더라도 내 덕에 무엇이 드러남이 있겠는가. 또 누가 능히
간하여 이것을 그치게 하였다고 하겠는가. 그것을 다시 말하지 말라"
그러나 시류에 영합하려는 무리들이 어찌 명예를 떨칠 기회를 놓치겠는가.
사헌부 장령 강진이 다음날인 10월 6일 두차례에 걸쳐 중지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그 다음 7일에는 사간원 좌정언 윤배가 다시 불사를 정지
하라고 상소하며 10월 9일에는 정창손이 다시 장문의 상소를 올려 불사
중지를 간청하는데 "일문이 모두 도륙된다 해도 직분을 다하지 못한 죄를
막지 못한다"느니 "천만세 후에 역대 호불하던 임금과 같이 역사에
남으리라"는 등의 불손한 언사를 기탄없이 구사한다.
이에 애초부터 정창손을 괘씸하게 보고 있던 세종은 간사하게 말을 꾸며
임금을 속이는 자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크게 꾸짖고 정창손과 강진
등을 의금부에 하옥하고 좌부승지 이사철(1405~56)로 하여금 국문하게 한다.
그러자 직제학 이계전(1404~59)을 비롯한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이
언론을 맡은 관리들이 말을 잘못했다 하여 벌을 주면 언로가 막히니 풀어
달라고 주청하니 세종은 못이기는 척하며 수양대군을 시켜 이들을 풀어주게
하는데 정창손과 강진만은 용서하지 않는다.
정창손은 근시의 직임을 거치고 단정한 선비의 이름을 얻은 자인데도 남보다
늦게 반대했다는 혐의를 살까봐 조회하는 날 각 사 관리가 불사에 쓰일
물건을 대느라고 조회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보고 장차 대자암에서 불사를
베푼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등 거짓말을 꾸며 대었다는 것이다.
간사하고 불초한 소인배이니 장차 어떤 짓을 못할까보냐 면서 몇달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끝까지 추궁하여 실정을 밝히겠다고 다짐한다.
과연 세종은 사람을 정확히 알아보는 지인지감을 타고 났었던가 보다.
정창손이 뒷날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을 복위시키려 했을
때 이를 고변하여 수많은 충의지사들과 세종이 그렇게도 사랑하던 왕세손
단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장본인이었으니 말이다.
이떻든 세종은 10월 15일에 대자암에서 돌아간 왕비를 위해 전경법회를
크게 베푸는데 승려 1천여명이 모여 7일 밤낮을 계속하였다 한다.
떡과 엿 과자 음식 등이 산같이 쌓이고 주옥으로 정교하게 등을 만들어
장엄하였으며 금자.은자 사경의 경집은 황금으로 용을 그려 장식하였다 한다.
왕세자와 대군 제군 등 왕실 종친과 내외명부 등이 참예하는 큰 불사였으니
그 성대한 규모가 어떠하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대자암은 지금 벽제 조금 지나 대자리에 있었던 절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