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익수 <쌍용경제연구원 경영연구부장>

위기의 한국경제.

그 재앙의 진원지는 어디인가.

정치집단의 무능과 비능률, 정부의 정책오류, 기업의 경영실패, 노동자의
근로의욕감퇴와 고임금, 소비자의 과소비 행태 등.

현위기상황을 가져온 한국경제 내부요인만 해도 이렇듯 많으며 WTO
(세계무역기구)체제출범 등 외부환경요인까지 고려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그렇다면 이렇듯 복잡한 문제의 저변에 흐르는 본질적 문제는 과연
무엇일까.

노이로제 등 많은 정신질환의 경우 증상의 원인을 추적해 들어가면
출발점에 문제의 단초가 되는 그릇된 확신이나 가정이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그릇된 사고의 단초가 다른 요인과 상승작용을 일으킴으로써 심한
정신분열에까지 이를수 있다는 것이다.

그 원인이 되는 그릇된 확신이나 가정을 찾아 고침으로써 증상을
근원적으로 해결할수가 있다.

경제문제도 증상에 대한 원인치료적 접근이 필요하다.

학습조직이론의 창시자 피터 센게(Peter M Senge)는 이런 관점에서
우리에게 매우 유용한 개념적 틀을 제시한다.

센게는 세계가 점점 상호의존적이 되고 비즈니스가 더욱 동적이고
복잡해질수록 문제를 체계적으로 접근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위한 5가지 기본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그중 하나인 "정신모델"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행동을 취하는 방법에
영향을 미치는 "뿌리깊은 가정"을 의미한다.

개인이나 조직의 정신모델이 잘못되어 있거나 환경변화에 상호적합되지
못할 때 개인이나 조직은 위기를 맞을 수 있다.

따라서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위해서는 기존의 가정들을 보류하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는 학습과정이 필요하다.

대규모 경상적자, 원화가치의 하락, 고금리, 주가폭락, 대기업부도 등
최근 경제현상에 나타난 위기적 증상도 정부 기업 소비자 등 경제주체의
그릇된 정신모델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정부가 경제현상을 이해하고 정책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과거 산업화초기
단계 정부주도계획경제체제에서의 기본가정들을 아직도 보류하지 않은채
개방화 정보화시대 국제경쟁체제에 대응하고 있거나, 기업이 낡은
정신모델에 얽매여 시장 기술 경쟁자 경쟁규범 등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문제의 뿌리를 찾을수 있다.

한국경제위기의 근원이 된다고 판단되는 그릇된 가정들 중에서 기업의
투자행위와 관련된 뿌리깊은 가정은 "기업의 경쟁력은 생산규모, 즉 외형에
크게 의존한다"는 가정이다.

철강 조선 자동차 반도체 등에서 우리는 세계 최대규모의 공장을
설립하였으며, 규모경제에 근거한 가격경쟁력을 기반으로 세계시장에서
우리산업의 위상을 높여 왔다.

이런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정부보증의 저금리 해외차입, 시장금리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저리의 정책자금지원, 수입규제를 통한 내수시장보호,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과 긴밀한 정부-기업관계, 표준화된 기술체계,
선진국으로부터의 쉬운 기술이전, 공급과잉의 노동시장 등의 여건이 계속
보장된다면 이 가정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러나 이미 세계화 정보화시대에 진입하고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으로 선진국대열에 참여한 현 시점에서 산업화시대의 투자환경에 근본적
변혁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과거 대규모투자의 실질적 설계자이며 지원자였던 정부의 역할은
WTO체제에서 크게 제약될 수 밖에 없으며, 기업은 자신의 신용과
위험부담으로 투자자금을 조달해야 하며 자력으로 독자기술을 포함한
경쟁역량을 확보하여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정부에 의존해 대규모투자를 통한 선점의 이익을
얻으려는 의도에서 70년대식 투자의사결정을 한다면 이는 큰 재앙의
불씨가 되고 말 것이다.

한보그룹의 사례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고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정부와 기업이 학습기회로 활용하여야 한다.

규모의 경제에 대한 논리와 가정은 오랫동안 한국기업의 투자의사결정과
관련한 정신모델이 되어 왔다.

한국경제의 기적적 성장,한국기업이 이룩한 신화적 과업, 한국기업가의
영웅적 이야기 속에는 이 정신모델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도 울산 포항 창원 등에 있는 대규모공장은 한국기업신화의
상징물로서 관광명소가 되어 있으며 대기업과 관련한 영웅적 에피소드는
어디에서나 쉽게 접할수 있다.

많은 창업자 중소기업인,심지어 중견기업인에게서도 과거 대기업신화
속에 나오는 가정들을 자신의 행동모델로 삼으려는 경향이 흔히 발견된다.

불굴의 기업가정신 등은 물론 본받아야 하겠으나 외형우위논리와 같은
그릇된 가정들을 답습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한국경제가 재도약하고 한국기업이 재기하기 위해서는 이제 새로운
기업신화가 창조되어야 하며 새시대의 영웅상이 정립되어야 한다.

독점적 기술력을 바탕으로 세계적 브랜드를 구축하는 작지만 강한 기업,
사회적 책임과 기업윤리에 대한 새로운 행동모델을 실천적으로 정착시키는
기업, 세계화시대 초일류 세계기업으로의 발전모델을 새롭게 제시하는 기업,
이런 것이 우리가 창조해야 할 새로운 기업신화이며 우리 모두가 기대하는
새시대 새영웅상이다.

정부와 시민도 자신의 낡은 정신모델을 수정함으로써 새로운 기업신화가
창출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할 시대적 책임을 지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