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진나라때 일이다.

세도가 범씨가 몰락하게 됐다.

이틈을 타 한 도둑이 범씨가 애지중지하던 보석종을 훔치려 했다.

그러나 종이 너무 크다고 생각한 도둑은 보석종을 잘게 부숴 도망가려고
망치로 힘껏 내리치고 말았다.

종소리가 온 사방에 울려퍼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놀란 도둑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자신의 귀부터 막았다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

이른바 엄이도령(제 귀 막고 종 훔치기)이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우리는 요즈음 한국판 "엄이도령"이라는 비극적 희극을 바라보고 있다.

대통령은 애써 귀를 막고 있고 주변사람들은 각종 이권을 챙겨 이리저리
도망가는 단막극을 보고 있는 국민들의 심정은 착잡하다.

우리 국민중 대통령이 "직접" 돈을 받았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깨끗할 것을 누차 당부했으리라는 것 또한 의심할
이유는 없다.

언젠가 한이헌 전 청와대경제수석이 들려준 얘기는 그러한 유추를 가능케
한다.

말 많던 삼성자동차 생산면허문제가 최종매듭지어지던 날의 얘기다.

결론을 내린 대통령은 한수석에게 이를 삼성에 통보해주라고 지시했다.

한수석이 삼성고위층을 만나러 막 떠나려는 순간 대통령실에서 다급히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뭔가 틀어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통령이 부르신다니 일단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수석을 다시 부른 대통령이 내뱉은 말은 전혀 의외였다.

"오늘 삼성사람들이 돈 주더라도 절대 받지마레이..."

김대통령이 돈 문제를 얼마나 경계하고 있었는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만들어낸 이야기일 수는 있으나 한수석이 이런 얘기까지 꾸며댔을 리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김대통령이 스스로의 귀만 막으면 도둑질이
없어지리라고 믿는 자기최면에 빠져 있는 사이, 나라는 한마디로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누더기가 된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험악해진 인심과 인성파괴는 삶자체에
회의를 느끼게 할 정도라는 소리가 적지 않다.

이런 형국에 "나는 안받았다"는 김대통령의 외마디는 더이상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요즈음 들어 대통령은 모든 책임을 지고 하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본인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는 주장도 있다.

흔히들 북한의 붕괴가 시작됐다고 떠들어대지만 이대로 가다간 우리
스스로가 먼저 붕괴될까 두렵다는 독설을 뿜어대는 사람들까지 있다.

민심이 흉흉해질대로 흉흉해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큰 비극은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데 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온전한 사람을 찾아 볼수 없게 됐다.

나무위에 올려 놓고 흔들기만을 일삼아온 우리사회에서 사지를 제대로
유지하고 있는 사람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 모른다.

자기관리를 깨끗이 해온 사람들은 아예 나설 생각을 않고 있다.

그러니 진정한 지도자가 우리 눈에 잡힐리 없다.

하지만 아무리 상황이 어렵더라도 그 어딘가에 한그루 사과나무를 심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기업인들과 말없이 일하는 근로자들이 그들이다.

믿을 것은 이들밖에 없다는게 요즈음의 인식이다.

이들이 용기를 잃지 않는한 우리에게 희망은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이들을 제대로 보살펴주지 못하고 있다.

정치인 검찰 관료 언론인들 모두가 한통속이라는게 사회의 일반적
시각이다.

서로 용기를 북돋워주기는 커녕 마지막 남은 용기마저 꺾어버리는 것이
우리사회의 현실이다.

정치인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중소기업을 지원해야 한다고 외쳐댄다.

하지만 중소기업인들은 "이들의 방해만 없어도 살겠다"고 하소연하는
실정이다.

꽤나 잘 알려진 (주)메디슨 이민화 사장의 절규는 이시대 중소기업인의
고민을 함축하고 있다.

"우리회사 제품은 제가 박사학위과정을 밟으면서 취득한 기술을 상품화한
것입니다.

모든 중소기업들이 그렇지만 우리도 그동안 여러 죽을 고비를 넘기며
커왔고 막 한숨돌리려는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한 정치인이 우리회사가 특혜대출로 커왔다고 주장하면서
하루아침에 구설수에 휘말리게 됐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냥 지나가다 심심풀이로 작은 돌을 던져 보는 것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바로 그 돌에 맞아 죽어갑니다"

특혜대출 사실여부를 떠나 이 중견기업인의 하소연은 한번쯤 곰곰이
새겨들을 가치가 있다.

최근들어 많은 기업들이 부도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부도는 기업장례식이다.

부도를 내는 것은 범죄행위다.

왜냐하면 부도는 근로자들의 삶터를 빼앗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저의를 가지고 자금악화설을 유포하는 사람, 또 이를 무책임하게 보도하는
언론, 설 자체만으로 하루아침에 얼굴 바꿔가며 자금을 회수하거나 자금
지원을 중단하는 금융기관, 이들 모두가 부도공범임에 틀림없다.

"엄이도령"은 대통령과 그 주변 집단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부지불식간에 엄이도령의 우를 범하고 있는지 모른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