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한 광경을 보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자".

고서에서 들쳐낸 한 구절의 당시로 자신의 중국방문목적을 함축했던
엘 고어 미국부통령이 25,26일 리펑(이붕)총리 장저민(강택민)국가주석과
잇따라 최고위급회담을 갖고 있다.

표면적으로 나타난 고어 부통령의 방중목적은 올 하반기로 예정된 클린턴
대통령과 장 주석간 양국 정상회담내용의 알맹이조율이다.

그러나 일제히 타전돼 들어온 외신은 고어의 방중보다도 중국의 보잉기
구매결정을 더 크게 다루고 있다.

고어 부통령의 이번 방문이 "경제"적인 것이라는 의미부여를 어느누구나
거부감없이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그렇다면 미 행정부가 보이고 있는 대중활동의 단기적인 종착역은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으로 해석될 수있다.

결국 중국의 WTO 가입에 위한 양국간 묵시적 합의의 재확인이 고어방문의
감쳐진 목적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인 것이다.

고어 부통령은 일단 중국지도자들과 "정치적 악수"를 함으로써 방문의
표면적인 목적을 달성했다.

두나라는 그동안 결코 편치않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특히 지난 89년 천안문 사태이후 양국관계의 기저는 미묘한 대립과 갈등
이었다.

미국의 최고위급관리로는 8년만에 처음 베이징을 밟았다는 사실이 과거의
껄끄러웠던 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더군다나 고어의 방중시점도 예사롭지 않다.

지금 워싱턴정가는 민주당의 불법대선자금에 중국이 연루돼 있다는 스캔들
로 무척 시끄러운 상황이다.

양국관계를 매끄럽게 하려는 최고지도자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집안간에도 단순히 "화해하자"는 말을 통해 관계수정을 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식사초대에 서로 응하면서 마음이 풀렸음을 보여준다.

고어 부통령의 이번 방문에도 "융숭한 대접"이 뒤따랐다.

그를 동행했던 미국기업 관계자들은 축하분위기를 고조시키려는 중국측
화답으로 커다란 선물보따리를 하나씩 안을 수 있었다.

제너럴모터즈(GM)는 상하이시의 중국국영자동차회사와 13억달러규모의
자동차합작생산을 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또 보잉사도 항공기 1백여대(10억달러상당)를 한꺼번에 판매하기로 중국과
계약을 맺음에 따라 만면에 희색이 감돌고 있다.

보잉사는 그동안 유럽국가들의 컨소시엄인 에어버스사에 밀려 약 15억달러
에 달하는 중국쪽 수주를 놓치는 창피를 당하기도 했었다.

한편 이번 방문에선 고정메뉴인 인권문제를 비롯, 홍콩반환이후에도 미국
영사관을 존속시키는 문제와 남북한 긴장완화를 위한 4자회담의 추진등을
최고위급회담의 주요의제로 테이블에 올려 놓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의제들은 부수적인 것들이다.

집권 1기동안 좌충우돌식으로 중국과 경제적 마찰을 빚어왔던 미국이
이제 중국을 확실히 WTO란 세계공인의 무대로 끌어내는 대중정책을 수립
했으며 결국 고어의 방문또한 이를 위한 물밑조정의 일환이라는 관측이다.

국제관계에서는 악수하는 손에서도 숨겨진 칼날을 발견할 수 있는 셈이다.

[[[ 중국의 입장 ]]]

중국당국이 수치상으로 나타난 대미 흑자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중국을
멸시하는 통상정책을 고수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이같은 비난을 퍼붓는 이유는 예상되는 미국의 무역불균형 주장에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중국은 ''미국 때문에'' 무역불균형이 발생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미국이 대중수출규제정책을 다소 완화시키기는 했으나 시행과정에서 여전히
중국을 멸시하는 규정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측은 또 미국측이 지난해 중국과의 교역에서 3백95억2천만달러의
적자를 봤다고 밝히고 있으나 실제는 1백5억3천만달러에 불과하다고 맞서고
있다.

이같은 양극간의 무역통계의 차이는 홍콩을 통한 중국산제품의 대무수출을
통계로 잡느냐(미국), 안잡느냐(중국)에서 발생한다.

중국은 대미수출의 성격도 거론하고 있다.

중국이 미국에 수출하는 상품의 절반 이상이 홍콩이나 제3국을 통한
중계무역이고 가공무역이 주류라고 밝히고 있다.

중국당국은 무역통계의 차이를 들어 무역불균형 문제의 초점을 흐리게
한다는 전략인데 반해 앨고어부통령은 양국간 교역발전을 위해선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 베이징=김영근 특파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