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으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위세당당하던 권력층의 핵심인물들이 줄줄이
TV화면에 나타나 때로는 당당하게 반론을 펴고 때로는 변명을 늘어놨었다.

몇몇 의원들은 정치한 논리를 내세워 칼날같은 질문을 퍼부어대며
증언대에 선 과거의 유력인사들을 몰아세웠다.

지난 88년 전두환정권의 뒤를 이어 등장한 5공청문회 모습의 일부다.

권불십년이라는 문구를 실감나게 했고 5공화국치하에서 갖가지 권력의
폐해를 경험했던 대다수 국민들은 체증이 가시는 느낌을 가졌었다.

그런 청문회가 문민정권에서 다시 열리게 됐다.

국회한보국정조사특위는 이미 활동에 들어갔고 본격적인 청문회는 다음달
7일부터 TV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열릴 예정이다.

특위의 초반활동에서는 재정경제원 통산산업부 금융기관 등 한보와 관련된
기관들을 상대로 특위위원들이 갖가지 의혹부분에 대해 비교적 충실하게
파고 들고 있다는게 취재기자들의 평가다.

위원들의 준비가 비교적 충실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이어질 청문회의 전망이 밝다고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번 청문회의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심하게 말해서 속시원하게 국민의 궁금증을 풀어줬다기보다는 몇몇
의원들을 스타로 만드는데 그친게 5공청문회였다.

당시 청문회는 군사정부라는 오명을 벗어나기 위해 이전 정권을
단죄하려는 집권당의 의도와 정치공세를 펼침으로써 대중의 지지도를
끌어올리려는 야당의 뜻이 맞아 떨어진 정치적 협상의 산물이었다.

야당과의 합의라는 형식을 통하기는 했지만 집권당이 정당성을 찾기위해
벌인 고육지책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출발이 그러했으니 청문회를 통해서 새롭게 밝혀진 것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야당이 펼치는 정치공세의 장이 되었고 곤란한
질문들에 대해서 증인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일부 의원들은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가 하면 욕을 퍼부어대기도 했었다.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자는 취지는 전직권력자들을 향한 한풀이 정도로
변했고 일부 의원들은 증인의 변명을 옹호하고 과거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몸짓도 보였다.

해서 청문회의 열기가 가신 다음에는 왠지 허전했던 기억이 있다.

한보청문회가 이런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현재로서는 서지
않는다.

의원들의 질문은 시중의 소문을 반복하는 것에 머물고 그나마 몇차례
되풀이 된 후에는 국민이 바라보고 있으니 똑바로 대답하라는 호통으로
그칠 가능성이 크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한보청문회 최대의 관심사인 김영삼 대통령아들에 대한 청문회의 결론도
용두사미가 될 가능성이 크다.

김현철씨가 국회청문회에 대비해 야당총재의 가족문제를 걸고 넘어질
전략을 세웠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소속정당 총재의 도덕성을 건드리는 질문이 나오게 되면 의원들은 충성
경쟁을 하듯 달려들어 청문회를 난장판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

국민들이 갖고 있는 의혹을 풀기보다는 상대방의 약점을 최대한 거론해
이미지를 손상시키고 이를 12월대선 때까지 끌고 가 보자는게 야당의
속셈일테고 여당은 대통령의 아들을 청문회에 내보냈으면 됐지 더이상 무얼
캐내보자는 거냐고 맞설 터이니 말이다.

한보와 관련한 모든 의혹은 검찰의 수사결과 이상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고
혹시 직권남용이나 뇌물수수 외압혐의가 있더라도 형사고발여부를 놓고
여야가 맞설 것이다.

그렇게되면 한보청문회는 한편의 정치쇼가 될 뿐이다.

의혹의 장본인인 대통령아들이 TV화면에 얼굴을 비치고 야당의원들이
큰소리 한번 지르는 것으로 문민청문회는 막을 내릴 것이다.

과거의 청문회경험으로 미루어 그럴 것이라는 얘기다.

이렇듯 뻔한 결과가 예상되는 청문회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이유는
이번만은 달라지지 않을까하는 기대때문이다.

아니 이번만은 달라져 달라는 바램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면 더이상 바랄 것이 없지만 혹시 그렇지 못하더라도
이번 청문회가 사조직을 동원한 권력운용 실태의 일부라도 들어냄으로써
다음 정권을 잡는 사람들에게 교훈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