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유화업계가 미쳤다"

90년초 우리나라에 NCC(나프타분해공장)투자붐이 불때다.

유공과 대림산업 등 기존 2개 업체외에 6개사가 새로 NCC를 짓겠다고
나서자 일본 유화업계의 반응은 이처럼 냉랭했다.

내수기반도 없는데 생산능력을 4배나 늘리겠다니 공급과잉으로 공멸할
것이 뻔하다는 게 그들의 시각이었던 셈이다.

실제로 이 예상은 거의 들어맞는 듯 했다.

93년 대한유화가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등 기존.

신규업체 가릴 것 없이 8개사가 모두 90년부터 내리 4년간 적자를 냈다.

그러나 그건 잠시.

94년 세계 경기가 급격히 회복되면서 이 "미친 짓"이 일을 내고 만다.

일본은 동남아시장 주도권을 수출여력이 급증한 한국에 고스란히 내줘야
했다.

과감한 결단력-.

울산콤플렉스 설립 이후 20년이 채 못되는 짧은 기간 동안 한국을 세계
5위의 석유화학공업국으로 끌어올린 데는 NCC업계 사장들의 이같은
"밀어붙이기"가 큰 힘이 됐다.

계열공장까지 합하면 약 1조원이 넘는 초대형 투자를 강행할 수 있으려면
이런 뚝심이 필수다.

NCC업계는 특성상 웬만한 계열공장 하나도 최소 1천억원 정도는 투자해야
한다.

주변의 모든 이가 "된다"는 사업도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기회다 싶으면 아무리 말려도 한 번 베팅하는 배짱이 없으면 결코 유능한
사장이란 소릴 들을 수 없다.

최고로 조화된 "투자의 미학"을 창조하는 것이 목적인 만큼 "고독한
결단"도 결국 사장의 몫이 된다.

그렇기에 이들의 평소활동은 결단을 위한 준비작업의 연속이다.

경기의 큰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눈을 키우는 것은 사장 수업의 기본이자
최대 난제이기도 하다.

그것도 국내 경기뿐 아니라 미국 유럽등 선진국, 중국등 수출대상국을
포함하는 세계 경기 전반의 흐름을 한발 앞서 파악해야 하는 만큼 많은
노력없이는 완성이 쉽지 않다.

그래서 NCC업계 사장들은 다른 어떤 업종 사장들보다도 역사책을 많이
읽는다.

외국 석학 초청 조찬강연회에 가보면 NCC업계 사장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 보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자연히 스케일이 커질 수 밖에 없지만 이들의 경영스타일의 한켠엔
정반대로 "세심함"이 자리잡고 있다.

한건의 사고도 용납할 수 없는 NCC업계의 특성 탓이다.

실제로 8개 NCC업계 사장들의 경영신조는 대부분 "하면 된다" "기술이
최고다" "안전 제일" 등의 내용에 집중돼있다.

시즌을 타는 범용제품의 특성상 가동차질로 제때 물건을 못내면 1년
농사를 망칠 때가 적지 않다.

최근 들어서는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찍혀" 한줄기 연기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정말 이들을 괴롭히는 건 1년마다의 영업성과로
경영의 전부를 평가하는 관행이다.

업종 특성상 3~5년, 때론 10년 앞을 내다보고 투자해야 하는 때가 많은데
이것이 불가능한 게 비(비)오너 경영인의 현실이다.

그래서 때로는 대규모 투자에 따른 초기적자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뒤
투자의 결실을 후임자에게 넘겨주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전임자가 무리하게 투자해놓은 뒷감당만 하다 떠나는 사장도 있다.

그래서 업계 사람들은 NCC업계 사장들의 이런 위치를 비하해 "운칠기삼"
이라고까지 얘기하기도 한다.

최근 NCC업계는 "시황에 흔들리지 않는" 방향으로 사업구조를 전면
재조정하고 있다.

국제시황에 따라 천장과 바닥을 왔다갔다하는 기존의 사업구조로는 미래형
사업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뚝심이나 배짱 보다는 정보마인드를 강조하는 경영인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맥락으로 봐야할 것같다.

< 권영설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