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한 문제들을 논의할때 항용 비판은 잘하면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된다.

오늘날 국정을 이끌어가는 정치와 나라의 여론을 주도하는 언론산업에서
이와같은 중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여러사람이 모여 좋은 방안을 찾아내자면 토론을 잘해야 하는데
아이들이 밥상머리에서 조용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문화였고 선비는
결론적인 주장만을 내세워 목숨을 바침으로써 그 기상이 존경받아
왔던 것이 우리의 정치사였다.

이조 오백년의 사색당쟁은 상대방을 헐뜯기로 날을 보냈다.

우리의 언론은 지난 백년의 근대화 과정을 함께 하면서 비판이 바로
대안이었던 아이러니컬한 시대를 거쳐왔다.

36년간의 일제 식민통치와 해방후의 독재정치를 비판하고 여기에 저항한
것은 비판과 저항 그 자체가 유일한 대안이었다.

따라서 1960년대 이후 산업사회로 급격히 전환되면서 다양한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여러가지 대안에 대한 정보와 토론의 제공에 부족하고 소홀했다.

너무나 오랫동안 독립과 반독재운동이 유일무인한 철학이 되어왔던
셈이다.

국회의사당에서의 민주투사들과 신문지상의 이름있는 컬럼리스트들은
매서운 비판으로서 이름을 날렀는데 그것은 독재정치 아래에서 용기있는
지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가 서서히 진행되고 드디어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이지사들의 표적이 사라졌고 국민들이 원하는 것이 바뀌게
되었다.

나라를 진실로 부강하게 하는 것,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것, 경제를
살리는 것, 문화를 창달하고 생활의 질을 높이는 것들에 대해 현재의
상태를 비판만 하는 것을 뛰어넘어 휼륭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부정과 부패를 추방함에 있어서도 목청 돋은 고발이나 의욕만으로는
안되고 현재의 모든 관련 법규와 행정에 대한 광범위한 대안이 만들어져야
한다.

이미 국민들이 무작정한 비판이고 무엇이 앞날을 설계하는 대안임을
잘 식별하게 되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