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열전] (14) 절재 김종서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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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때 세종은 비록 이선 뿐만 아니라 조정대신들이 모두 뇌물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해이해진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 기회가 뜻밖에 쉽게 찾아 들었다.
환관 하나가 제주도 여자에게 장가들어 제주 경저근방에 살고 있는데
제주목사 이흥문이 뇌물로 보낸 물건들이 진상이란 나무 팻말을 붙인 채
제주 경저에 무수히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에 세종은 윤 4월14일에 우참찬 정갑손을 불러 이 사실을 알리고
이흥문이 섬에 나가 있으면서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뇌물을 바치는
일에만 전념하였으므로 장차 국문하려 하니 의정부 대신들과 의논하여
아뢰라 한다.
이에 영의정 황희, 우의정 하연, 좌찬성 황보인, 우찬성 김종서, 좌참찬
정분, 우참찬 정갑손이 함께 아뢰기를 "감사나 수령이 불법한 일은 풍문으로
핵실한다는 것이 육법전서(육전)에 실려 있으니 이치로는 응당 추국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이 맡은 관청으로부터 들은 바가 아니고 환관의 말에서
나왔으므로 이로써 적발해 낸다면 대체에 어그러짐이 있을 듯 하니 다만
흥문을 쫓아내는 것만이 옳을 듯 합니다"라고 한다.
이어서 대신들은 이렇게 자수한다.
"다만 신 희, 연, 종서, 분, 갑손이 모두 흥문이 보낸 것을 받았으니
의논하여 아뢰기가 어렵습니다"
이에 세종은 즉시 이조에 명하여 흥문의 고신을 빼앗으라 하였다.
명령이 내려지자 황희와 하연, 김종서, 정분, 정갑손은 함께 대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신 등이 모두 보낸 것을 받았는데 부끄러운 얼굴로 그
자리에 있었으니 황공하여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물러가서 죄 기다릴 것을 청합니다"라고 한다.
이에 세종은 음식물 받는 것을 금령으로 제정하지 않았으니 거리끼지 말고
직책에 나오라고 위로하며 받은 것이 생선포나 마구 등속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 하는데 특별히 흥문 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제주 수령이 된 자들은
누구나 진상하고 바치던 것이 아니냐며 염려하지 말라 한다.
그러자 도승지 황수신과 좌승지 이사철도 역시 마구를 받았었노라고
자수하며 대죄를 청한다.
세종은 이도 역시 허락지 않았으나 새로 부임하여 이런 뇌물에 물들지
않은 동부승지 이계전(1404~1459)을 불러 이런 탐욕스런 풍습은 금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뇌물을 물리치던 옛일을 수집하여 안팎에 경계하고 유시하고자
하니 이런 내용의 교서를 지어드리라 한다.
그러나 세종은 이런 일을 교서로 국왕이 경계하는 것보다 사헌부의 장계로
아뢰는 것이 대신의 체면을 살릴 듯하여 세자를 통해 그 뜻을 이계전에게
전하니 5월22일에 사헌부에서는 장문의 장계를 올려 뇌물 상납의 폐해를
지적한다.
어포 등 음식물과 마구 등을 선물받았다고 하여 이를 받은 대신들이 모두
자수하고 대죄하며 국왕은 이를 기강의 해이로 보고 역대 선현들이 뇌물을
물리치던 고사를 열거하며 그를 경계하는 소장을 올리게 하였다니 나라
예산에 육박할 만큼 거액의 돈이 뇌물로 오가는 오늘날과 비교해 보면 정녕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다 하겠다.
김종서가 제주목사 이흥문이 선물한 생선포를 받고 황희, 하연 등 의정부
정승들과 함께 임금께 대죄를 청하는 등 망신을 당하던 어름에 김종서는
자신의 문장과 필법을 후세에 남길 수 있는 기회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김종서를 살해한 후에 그의 흔적을
철저하게 지워버렸기 때문에 시문이나 필적이 남아있는 것이 전무한데
안평대군의 수장품을 반역의 대가로 차지하였던 신숙주가 안평대군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놓았던 "몽유도원도"를 원형대로 보존해 놓았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여러 충의지사들의 제화시와 함께 김종서의 제화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몽유도원도"는 그 후에 어떤 수장경로를 거쳤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현재는 일본 천리대학 도서관에 수장되어 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국립박물관과 호암미술관에서 이를 빌려다 전시한
적이 있는데 그 원본을 통해 보면 이 "몽유도원도"가 이루어 지는 것이 바로
김종서가 충청도를 돌아보고 올라온 직후인 4월23일이었다 한다.
안평대군이 짓고 쓴 그 기문에 의하면 정묘년, 즉 세종 29년(1447) 4월
20일 밤 꿈에 집현전 교리로 안평대군과 친교가 깊던 취금헌 박팽년(1417~
1456)과 함께 말머리를 가지런히 하여 신선세계로 알려진 도원동에 들어가
노닐었는데 뒤따르던 최항, 신숙주 등과 함께 시를 지으며 즐기다가 깨어
보니 꿈이라서 그 꿈에 본 도원의 모습을 당시 화원 화가의 대표인 현동자
안견(1418~?. 자는 가도)에게 말하고 그대로 그리게 하니 안견은 3일만에
이를 그려 왔다.
이것이 바로 "몽유도원도"인데 안견은 자신이 구사하고 있던 북송원체
화풍의 그림법(화법)으로 이를 그려내고 있어 산봉우리들이 마치 황토층이
빗물에 씻겨 만들어진 흙언덕(토파)처럼 기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고 복숭아
나뭇가지들은 게발톱(해조)처럼 굳세고 날카롭게 표현되어 찬바람에
시달리며 자라난 북중국 나무 특유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주자성리학을 국시로 천명하여 그 이념기반을 다져가던 시기답게 중국
화풍을 철저하게 모방하여 정착시키려는 노력이 잘 반영된 그림이다.
안평대군이 원나라 예원을 주도했었던 송설 조맹부(1254~1322)의 송설체를
철저하게 따라 쓴 기문의 글씨와 같은 맥락을 보이는 중국풍의 그림
양식이다.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경치는 사실 우리 경치였을 터인데 안견은 그
경치를 묘사하면서 북중국 경치를 그려내는 북송원체화풍의 그림법에
의존하게 되다보니 결과적으로 북중국의 경치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안평대군과 같은 당대제일 안목도 산수화는 당연히 이와 같아야
된다고 생각하며 아무 이견이 없었던 듯 하다.
만약 조선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진경산수화풍을 창안해 낸 겸재 정선
(1676~1759)이 이 꿈얘기를 듣고 그려냈다면 어떻게 그렸을까.
필연 금강산이나 삼각산 같은 우리 산천의 모습으로 그려냈을 것이다.
한시대의 예술양식이 그를 꽃피워 내는 이념의 성격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여실하게 증명해 주는 대표적인 그림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그림을 보고 안평대군의 기문을 읽은 당대 석학들이 이 그림을
도원경의 참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의정 하연을 비롯해서 우찬성 김종서와 함께 19명의 집현전
학사들이 여기에 장문의 친필제화시를 붙이고 있다.
안평대군의 특청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일 터이다.
이제 그 시와 글씨를 보면 모두 상승에 이른 것들인데 그 중에서도
김종서의 시와 글씨가 가장 빼어나고 중후하다.
제화시를 짓고 쓴 모든 석학들이 한결같이 송설체를 따라 쓰고 있어서
송설체의 흠으로 지적되는 예쁘고 섬세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중에
김종서의 글씨만은 안진경(708~784)체의 중후한 맛을 바탕에 깔고 있어 마치
소동파(이름은 식. 1036~1101)의 글씨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만고의 충신 열사들은 그 성정이 같기에 그 글씨체도 비슷했던가 보다.
김종서의 친필 글씨로 된 문서들을 철저하게 파괴하였으므로 당세 문원의
종장으로 예조판서를 6년이나 역임하였던 대종백 김종서의 친필은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거의 전무하다.
뒷날 그의 충의와 공덕을 사모하는 많은 후진들이 한쪽의 유필유목이라도
소장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으나 오히려 그런 노력들이 몇몇의
서로 다른 글씨만을 남겨 놓아 그 글씨의 진면목을 이해하는데 혼란을
일으키기만 한다.
그런데 이 "몽유도원도"의 제화시만은 다른 여러 학사들의 글씨와 함께
진적이 틀림없으니 이 글씨가 김종서 글씨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그동안 세간에 나돌던 김종서 글씨 중에 이 제화시 글씨와
글씨체가 다르다면 우리는 그 내용을 다시 한번 검토하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이제 오언고시의 장문으로 엮어진 그 제화시 내용을 옮겨 보겠다.
"도원이 몽혼(꿈꾸는 혼)으로 들어오니, 몽혼은 도원으로 들어간다.
신기의 변화 서로 끝이 없으니, 누가 능히 조화의 본원을 알 수 있을까.
공자가 주공을 이어서, 천지 근본을 뒤 밟으니, 앞뒤의 생각이 같아,
꿈에서 얼마나 자주 뵈었나.
황량몽[당 심기제의 소설 "침중기"에 나오는 얘기, 한단의 노생이 도사
여옹의 베개를 베고 메조 밥을 짓는 동안에 부귀공명을 다 누리는 꿈을
꿨다는 내용]과 남가몽[당 이공좌 소설 "남가기"에 나오는 얘기, 동평의
순우분이 낮잠을 자면서 20년간 남가군을 다스리며 부귀영화를 누리는 꿈을
꾸었다는 내용]은 허망하여 말할 것 없으나, 달인이 신선을 꿈꾼다 하니,
옳구나 이 말이여.
자진(주령왕의 태자, 왕자교라고도 한다. 유향의 "열선전"에서 신선이
되어 학을 타고 날아갔다 한다)은 도기가 많아, 어려서부터 세속을
싫어하였고, 언제나 바깥 세상 그리워하며, 부귀를 뜬구름 같이 여겼었네.
멀고 먼 무릉(도원이 있는 곳)길, 아득한 진나라 세상.
우연히 꿈에서 만나, 마음대로 오르내리며 찾아다녔네.
깨어나 화공에게 그리게 하니, 만가지 형상 온전함을 얻어냈구나.
태고적부터 세상을 피해 들어가던 땅, 하루 저녁에 고헌(높은 대청마루,
안평대군의 별호로 쓰이기도 했다)으로 옮겨졌구나.
구슬 빛 사림에 비치니, 해와 달 빛을 뿜는다.
그림 펼치고 또 글을 읽으니, 즐거움으로 아침 저녁 다 보냈구나.
인생은 쇠나 돌이 아니라, 백년도 번개처럼 달아나느니. 어떻게 선도나무
뽑아내다가, 궁전 뜰안에 옮겨 심을 수 있어.
저 세번 도둑질 하던 아이(동방삭이 어려서 서왕모의 선도원인 원에서
한개를 먹으면 1천갑자를 산다는 선도를 세번이나 훔쳐 먹고 3천갑자를
살았다 한다(한무내전)).
꾸짖어대며, 만세토록 우리 임금께 바쳐올릴까"
제화시 말미에 세종대왕에 대한 충성심이 자신도 모르게 배어 나오고
있으니 김종서는 가슴속이 온통 충의지심으로 가득차있었던 모양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4일자).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해이해진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 기회가 뜻밖에 쉽게 찾아 들었다.
환관 하나가 제주도 여자에게 장가들어 제주 경저근방에 살고 있는데
제주목사 이흥문이 뇌물로 보낸 물건들이 진상이란 나무 팻말을 붙인 채
제주 경저에 무수히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에 세종은 윤 4월14일에 우참찬 정갑손을 불러 이 사실을 알리고
이흥문이 섬에 나가 있으면서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뇌물을 바치는
일에만 전념하였으므로 장차 국문하려 하니 의정부 대신들과 의논하여
아뢰라 한다.
이에 영의정 황희, 우의정 하연, 좌찬성 황보인, 우찬성 김종서, 좌참찬
정분, 우참찬 정갑손이 함께 아뢰기를 "감사나 수령이 불법한 일은 풍문으로
핵실한다는 것이 육법전서(육전)에 실려 있으니 이치로는 응당 추국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이 맡은 관청으로부터 들은 바가 아니고 환관의 말에서
나왔으므로 이로써 적발해 낸다면 대체에 어그러짐이 있을 듯 하니 다만
흥문을 쫓아내는 것만이 옳을 듯 합니다"라고 한다.
이어서 대신들은 이렇게 자수한다.
"다만 신 희, 연, 종서, 분, 갑손이 모두 흥문이 보낸 것을 받았으니
의논하여 아뢰기가 어렵습니다"
이에 세종은 즉시 이조에 명하여 흥문의 고신을 빼앗으라 하였다.
명령이 내려지자 황희와 하연, 김종서, 정분, 정갑손은 함께 대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신 등이 모두 보낸 것을 받았는데 부끄러운 얼굴로 그
자리에 있었으니 황공하여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물러가서 죄 기다릴 것을 청합니다"라고 한다.
이에 세종은 음식물 받는 것을 금령으로 제정하지 않았으니 거리끼지 말고
직책에 나오라고 위로하며 받은 것이 생선포나 마구 등속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 하는데 특별히 흥문 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제주 수령이 된 자들은
누구나 진상하고 바치던 것이 아니냐며 염려하지 말라 한다.
그러자 도승지 황수신과 좌승지 이사철도 역시 마구를 받았었노라고
자수하며 대죄를 청한다.
세종은 이도 역시 허락지 않았으나 새로 부임하여 이런 뇌물에 물들지
않은 동부승지 이계전(1404~1459)을 불러 이런 탐욕스런 풍습은 금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뇌물을 물리치던 옛일을 수집하여 안팎에 경계하고 유시하고자
하니 이런 내용의 교서를 지어드리라 한다.
그러나 세종은 이런 일을 교서로 국왕이 경계하는 것보다 사헌부의 장계로
아뢰는 것이 대신의 체면을 살릴 듯하여 세자를 통해 그 뜻을 이계전에게
전하니 5월22일에 사헌부에서는 장문의 장계를 올려 뇌물 상납의 폐해를
지적한다.
어포 등 음식물과 마구 등을 선물받았다고 하여 이를 받은 대신들이 모두
자수하고 대죄하며 국왕은 이를 기강의 해이로 보고 역대 선현들이 뇌물을
물리치던 고사를 열거하며 그를 경계하는 소장을 올리게 하였다니 나라
예산에 육박할 만큼 거액의 돈이 뇌물로 오가는 오늘날과 비교해 보면 정녕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다 하겠다.
김종서가 제주목사 이흥문이 선물한 생선포를 받고 황희, 하연 등 의정부
정승들과 함께 임금께 대죄를 청하는 등 망신을 당하던 어름에 김종서는
자신의 문장과 필법을 후세에 남길 수 있는 기회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김종서를 살해한 후에 그의 흔적을
철저하게 지워버렸기 때문에 시문이나 필적이 남아있는 것이 전무한데
안평대군의 수장품을 반역의 대가로 차지하였던 신숙주가 안평대군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놓았던 "몽유도원도"를 원형대로 보존해 놓았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여러 충의지사들의 제화시와 함께 김종서의 제화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몽유도원도"는 그 후에 어떤 수장경로를 거쳤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현재는 일본 천리대학 도서관에 수장되어 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국립박물관과 호암미술관에서 이를 빌려다 전시한
적이 있는데 그 원본을 통해 보면 이 "몽유도원도"가 이루어 지는 것이 바로
김종서가 충청도를 돌아보고 올라온 직후인 4월23일이었다 한다.
안평대군이 짓고 쓴 그 기문에 의하면 정묘년, 즉 세종 29년(1447) 4월
20일 밤 꿈에 집현전 교리로 안평대군과 친교가 깊던 취금헌 박팽년(1417~
1456)과 함께 말머리를 가지런히 하여 신선세계로 알려진 도원동에 들어가
노닐었는데 뒤따르던 최항, 신숙주 등과 함께 시를 지으며 즐기다가 깨어
보니 꿈이라서 그 꿈에 본 도원의 모습을 당시 화원 화가의 대표인 현동자
안견(1418~?. 자는 가도)에게 말하고 그대로 그리게 하니 안견은 3일만에
이를 그려 왔다.
이것이 바로 "몽유도원도"인데 안견은 자신이 구사하고 있던 북송원체
화풍의 그림법(화법)으로 이를 그려내고 있어 산봉우리들이 마치 황토층이
빗물에 씻겨 만들어진 흙언덕(토파)처럼 기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고 복숭아
나뭇가지들은 게발톱(해조)처럼 굳세고 날카롭게 표현되어 찬바람에
시달리며 자라난 북중국 나무 특유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주자성리학을 국시로 천명하여 그 이념기반을 다져가던 시기답게 중국
화풍을 철저하게 모방하여 정착시키려는 노력이 잘 반영된 그림이다.
안평대군이 원나라 예원을 주도했었던 송설 조맹부(1254~1322)의 송설체를
철저하게 따라 쓴 기문의 글씨와 같은 맥락을 보이는 중국풍의 그림
양식이다.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경치는 사실 우리 경치였을 터인데 안견은 그
경치를 묘사하면서 북중국 경치를 그려내는 북송원체화풍의 그림법에
의존하게 되다보니 결과적으로 북중국의 경치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안평대군과 같은 당대제일 안목도 산수화는 당연히 이와 같아야
된다고 생각하며 아무 이견이 없었던 듯 하다.
만약 조선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진경산수화풍을 창안해 낸 겸재 정선
(1676~1759)이 이 꿈얘기를 듣고 그려냈다면 어떻게 그렸을까.
필연 금강산이나 삼각산 같은 우리 산천의 모습으로 그려냈을 것이다.
한시대의 예술양식이 그를 꽃피워 내는 이념의 성격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여실하게 증명해 주는 대표적인 그림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그림을 보고 안평대군의 기문을 읽은 당대 석학들이 이 그림을
도원경의 참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의정 하연을 비롯해서 우찬성 김종서와 함께 19명의 집현전
학사들이 여기에 장문의 친필제화시를 붙이고 있다.
안평대군의 특청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일 터이다.
이제 그 시와 글씨를 보면 모두 상승에 이른 것들인데 그 중에서도
김종서의 시와 글씨가 가장 빼어나고 중후하다.
제화시를 짓고 쓴 모든 석학들이 한결같이 송설체를 따라 쓰고 있어서
송설체의 흠으로 지적되는 예쁘고 섬세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중에
김종서의 글씨만은 안진경(708~784)체의 중후한 맛을 바탕에 깔고 있어 마치
소동파(이름은 식. 1036~1101)의 글씨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만고의 충신 열사들은 그 성정이 같기에 그 글씨체도 비슷했던가 보다.
김종서의 친필 글씨로 된 문서들을 철저하게 파괴하였으므로 당세 문원의
종장으로 예조판서를 6년이나 역임하였던 대종백 김종서의 친필은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거의 전무하다.
뒷날 그의 충의와 공덕을 사모하는 많은 후진들이 한쪽의 유필유목이라도
소장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으나 오히려 그런 노력들이 몇몇의
서로 다른 글씨만을 남겨 놓아 그 글씨의 진면목을 이해하는데 혼란을
일으키기만 한다.
그런데 이 "몽유도원도"의 제화시만은 다른 여러 학사들의 글씨와 함께
진적이 틀림없으니 이 글씨가 김종서 글씨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그동안 세간에 나돌던 김종서 글씨 중에 이 제화시 글씨와
글씨체가 다르다면 우리는 그 내용을 다시 한번 검토하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이제 오언고시의 장문으로 엮어진 그 제화시 내용을 옮겨 보겠다.
"도원이 몽혼(꿈꾸는 혼)으로 들어오니, 몽혼은 도원으로 들어간다.
신기의 변화 서로 끝이 없으니, 누가 능히 조화의 본원을 알 수 있을까.
공자가 주공을 이어서, 천지 근본을 뒤 밟으니, 앞뒤의 생각이 같아,
꿈에서 얼마나 자주 뵈었나.
황량몽[당 심기제의 소설 "침중기"에 나오는 얘기, 한단의 노생이 도사
여옹의 베개를 베고 메조 밥을 짓는 동안에 부귀공명을 다 누리는 꿈을
꿨다는 내용]과 남가몽[당 이공좌 소설 "남가기"에 나오는 얘기, 동평의
순우분이 낮잠을 자면서 20년간 남가군을 다스리며 부귀영화를 누리는 꿈을
꾸었다는 내용]은 허망하여 말할 것 없으나, 달인이 신선을 꿈꾼다 하니,
옳구나 이 말이여.
자진(주령왕의 태자, 왕자교라고도 한다. 유향의 "열선전"에서 신선이
되어 학을 타고 날아갔다 한다)은 도기가 많아, 어려서부터 세속을
싫어하였고, 언제나 바깥 세상 그리워하며, 부귀를 뜬구름 같이 여겼었네.
멀고 먼 무릉(도원이 있는 곳)길, 아득한 진나라 세상.
우연히 꿈에서 만나, 마음대로 오르내리며 찾아다녔네.
깨어나 화공에게 그리게 하니, 만가지 형상 온전함을 얻어냈구나.
태고적부터 세상을 피해 들어가던 땅, 하루 저녁에 고헌(높은 대청마루,
안평대군의 별호로 쓰이기도 했다)으로 옮겨졌구나.
구슬 빛 사림에 비치니, 해와 달 빛을 뿜는다.
그림 펼치고 또 글을 읽으니, 즐거움으로 아침 저녁 다 보냈구나.
인생은 쇠나 돌이 아니라, 백년도 번개처럼 달아나느니. 어떻게 선도나무
뽑아내다가, 궁전 뜰안에 옮겨 심을 수 있어.
저 세번 도둑질 하던 아이(동방삭이 어려서 서왕모의 선도원인 원에서
한개를 먹으면 1천갑자를 산다는 선도를 세번이나 훔쳐 먹고 3천갑자를
살았다 한다(한무내전)).
꾸짖어대며, 만세토록 우리 임금께 바쳐올릴까"
제화시 말미에 세종대왕에 대한 충성심이 자신도 모르게 배어 나오고
있으니 김종서는 가슴속이 온통 충의지심으로 가득차있었던 모양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