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김정호 기자 ]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발디딜 틈이 없다.

쌓여만 가는 자동차 재고는 이제 공장에 한차의 빈땅도 남겨두질 않았다.

공장내 도로도 2~3열로 줄을 선 자동차들로 가득차 있다.

경비들이 여신 호루라기를 불어대며 교통정리를 하곤 있지만 길을 빠져
나가려면 곡예운전이 불가피하다.

자동차업계 재고 18만대가 몸으로 느껴지는 현장이다.

물론 이런 사정은 현대 뿐만이 아니다.

아시아 자동차 광주공장은 늘어나는 재고를 감당치 못해 이달들어서 이미
8.5t이상 대형트럭라인의 조업을 단축했다.

3월말 현재 내수용재고만 2만5천대를 넘긴 기아자동차도 더이상 차를
쌓아둘 곳이 없어 금명간 특별조치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대우 역시 잇따른 신차출시에도 불구 공장인근의 빈땅에는 "재고사태"라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로 차들로 빽빽하다.

"쌓아둘 곳이 없는데 정상조업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장인 한상준 부사장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하다.

더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결정이지만 공장장으로는 도저히 못할
것이라고 고개를 흔든다.

오는 8월부터 닷새동안 일부공장의 조업단축에 들어가기로 했지만
한부사장은 그 다음 걱정에 몸둘바를 몰라한다.

이런 사정이 닷새만에 해결될수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공장장만 괴로운게 아니다.

당장 급여에 문제가 생기는 근로자들은 더 큰 불안에 싸여 있다.

"조업단축이 어떤 의미인지 당장 피부에 와 닿지는 않지요.

하지만 언론의 조업단축에 대한 기사가 줄을 잇고 나서부터 현장은 그
기간이 더 길어질 수도 있다는 불안에 술렁이고 있습니다"

곧 조업단축에 들어갈 승용3공장에서 만난 고병설(35)씨의 이야기다.

1월에는 노동법 관련 파업과 휴업으로 조업이 거의 안된데다 2월달로
설날연휴로 조업일수가 많지 않았는데도 재고가 이렇게 쌓였다는게 가장 큰
걱정이라는 설명이다.

현대의 조업단축은 우선 잔업을 하지 않는 형태다.

하루 10시간에서 8시간으로 작업시간을 줄어들면서 수당도 그만큼 줄어
들게 된다.

더욱이 잔업수당은 정상조업수당보다 50%가 많다.

급여는 두시간치가 세시간치가 빠진다는 계산이다.

더구나 회사나 근로자들중 이 정도의 조업단축으로 재고가 소진되리라는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회사측은 각 공장별로 더이상 쌓아둘 곳이 없으면 자동으로 조업단축에
들어간다는 방침이다.

지금은 울산의 승용2공장과 아산공장 전주공장도 조업단축이 남의 이야기
만은 아니다.

협력업체들도 난리다.

"모기업의 재채기는 우리에게 심한 독감으로 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재채기 정도가 아니니..."

현대자동차에 부품을 납품하는 N사의 K상무는 1월부터 제대로 납품이 되지
않던 상황에서 또다시 조업단축을 맞게돼 미칠 지경이다.

함께 조업단축에 들어가면 임금이야 절약되겠지만 고정비 지출은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규모가 꽤 크다는 N사는 낫다.

더 작은 중소기업들이나 2차 협력업체들의 위기감은 사뭇 비장할 정도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불황의 골은 깊어가는데 1가구 2차량 중과세다 뭐다해서 자동차산업을
조여오는 규제는 왜 이렇게 많은지"

수출산업을 지원하진 못할 망정 온갖 규제로 발목잡는 정부가 야속하기만
하다는 3공장장 박용환 상무의 볼멘 소리다.

그런 가운데서도 노조가 한마음 운동에 동참하겠다는 약속을 해온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공장 근로자들도 한달에 한대씩 직접 차를 팔러 나서는데 동참키로 했다는
것이다.

과장급 이상 관리직들도 임금동결을 선언했다.

이젠 정부도 특단의 조치를 생각해야 할 때다.

그렇지 않고는 한국의 중추산업인 자동차산업은 자칫 회생불능의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

고정관념을 깨고 업계의 주장에도 귀 기울여 볼 때라는게 업계의 공통된
지적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