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원 <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

요즘 우리국민들의 관심은 온통 정치문제에 집중돼 있다.

누가 어떤 부정을 저질렀고 누구를 감옥에 넣어야 한다는 살벌한 얘기들이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다.

정치에 관한 논란은 가히 백가쟁명의 지경에 이르러 내일을 예측할수 없는
어지러운 국면을 만들고 있다.

우리가 이처럼 과거사에 몰두하고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 있는 동안
선진국은 물론 우리의 뒷전에 처져 있던 개발도상국들마저 다가오는 21세기
아니 그 이후의 미래세계를 논의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저들이 심혈을 기울여 연구하고 대비하는 문제는 정치문제가 아닌 인류
문명의 발전문제이며 인류복지의 무한한 가능성 개발에 관한 문제들이다.

이웃나라인 일본만 눈여겨 보더라도 그들이 어떻게 미래를 준비하고
자신들의 문화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국내외에서 얼마만큼 노력하고 있는지
알수 있다.

일본인들은 "정보"가 미래의 원광임을 터득, 첨단산업에 박차를 가하면서
일본문화의 보급을 위해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있다.

일본 문화보급의 첨병역할을 맡고 있는 재팬 파운데이션(일본 국제교류
기금)이 설립된 것은 1972년이었다.

지난 25년 동안 일본은 이 기금을 통해 가부키 다도 스모 사무라이로
대표되는 일본의 정신과 문화를 해외에 보급했다.

문화인프라 구축과 해외홍보는 일본의 창안물이 아니다.

유럽 선진국들이 이에 훨씬 앞서 추진해 온 사업들이다.

영국의 브리티시 카운슬, 독일의 괴테 인스티튜브, 프랑스의 알리앙스
프랑세주, 미국의 USIS 등은 언어나 문화를 도구 삼아 자국의 위상을 해외에
전파하는 문화공세 전략의 전초지이다.

그들이 이런 사업들을 위해 막대한 돈을 쓰고 있는 것은 단순히 자국문화에
대한 높은 평가를 받고자 함은 아니다.

문화전파를 통한 국가 위상의 제고는 자국 상품의 판로를 더 넓게 열어
준다는 실용주의적 사고와 계산이 작용된 것이다.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고고한 예절과 우아한 문화를 갖추고도 선조들이 물려준 문화유산마저
제대로 보존해 오지 못한데다 문화인프라 구축이나 해외 보급에는 관심을
쏟지 않았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이 설립된 것은 바로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더 늦기
전에 선진국들이 휩쓸고 지나간 문화공간을 비집고 들어가야겠다는 자각
에서였다.

92년에 출범했으니 이제 6년째 접어든다.

출발은 다소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스런 결정이었다.

재단 발족 이후 전세계의 90여개 대학에 한국연구 기반이 조성됐고 세계적
인 유명박물관에 우리문화만을 영구 전시할수 있는 한국실이 설치되었거나
개관을 준비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하버드대학에 한국문학을 가르치는 석좌교수직이 이미 설치
되었으며 올 연말이면 세계 최대 박물관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도
청아한 조선백자와 문화재들이 제자리를 잡을 한국실이 들어설 계획이다.

재단의 문화활동은 선진국에만 머무르지 않고 있다.

이집트의 카이로대학, 베트남의 하노이대학, 중국의 산동대학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 우리의 문화 역사 언어 등 한국학 연구와 강의 프로그램이
운영되어 "한국"을 심어 나가고 있다.

재단은 국민 기업 정부로부터 크고 작은 기여금을 전달받아 이런 일들을
수행해 나가고 있다.

지금 우리가 뿌리고 있는 작은 씨앗은 5년 10년뒤 외국의 토양에 우리의
문화를 꽃피우고 커다란 과실을 맺게 될 것이다.

그것은 또 한편으로 연어의 회귀성과 같은 예측된 국가적 이익을 안겨줄
것이다.

방류된 치어가 성어가 되어 모천으로 회귀하듯이 해외에 보급된 한국문화는
한국의 국가 위상을 높이고 "MADE IN KOREA"에 보다 높은 부가가치를 실어
되돌려 줄 것이다.

과거사와 정치에 집중된 우리의 관심을 반절만이라도 거두어 문화 문명
그리고 미래의 비전으로 눈을 돌려보는 슬기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요즈음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