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재판중인 사건이라 대답할 수 없습니다"

"장부를 보기전에는 답변할 수 없습니다"

2개월여가 넘게 국정을 뒤흔든 한보사건의 장본인인 정태수씨가 국회
청문회에서 말한 답변의 대표적인 예이다.

기술성 검토나 사업타당성에 대한 검토없이 앞다투어 대출에 나섰던
은행들, 서류검토없이 규정을 어겨가며 각종 인.허가를 내준 관료들, 대출과
허가를 내주라고 압력을 넣은 정치인들...

그러나 이들을 조연으로 한보사태를 연출한 그가 청문회에서 내놓은
답변은 한결같이 "모르겠다" "아니다"였다.

각서하나로 2천억의 특혜대출을 받은 것에 대해서도 그는 "땅이 있어서
대출을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가볍게 받아 넘겼다.

정치권에 대한 로비의혹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로 일관하면서도
"돈을 준 것은 죄가 되기 때문에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더구나 부도위기에 몰리자 임창열 당시 재경원차관을 만나 "기업을 부도
내는 것은 생이빨을 뽑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부작용이 따른다"며
"윗선에 얘기해 부도가 나지 않게 하라"는 협박성의 발언까지 했다고 한다.

그의 이같은 행태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는 지난 90년 수서사건때 이미 한차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당시 상황도 지금과 흡사하다.

정치권에 대한 로비를 통해 각종 특혜를 얻고 이를 바탕으로 급속히
기업을 성장시키다 부도를 냈다.

그런 그에게 우리는 너무 쉽게 면죄부를 주었다.

수서사건이 터진지 2년도 채안돼 한보는 여신규제에서 풀려났고 수서사건
당시 문제가 됐던 공유수면 매립지를 바탕으로 재계순위 14위로 복귀했던
것이다.

그는 이날 청문회에서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지 않은 것이 부도의
원인이다"라고 말했다.

당진제철소를 맡겨준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답변도 늘어놓았다.

기업을 일으킨 후 벌써 세번째 수감생활을 하면서도 그의 현실인식,
기업윤리가 하나도 바뀌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그의 고집과 무지함 때문일까.

아니면 수서사건을 어물쩍 넘긴 우리의 관대한 사회풍토 때문일까.

불철저한 역사적 청산이 7년만에 국민경제에 막대한 손실을 입히고 정국을
뒤흔들게 한 근본적 요인이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번 사태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고 그에 상응하는 조치가 따라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김태완 < 정치부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