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은 가만가만 말씀은 조용조용".

"이곳에는 물귀신이 있으니 수영하지 마십시오".

앞의 것은 섬진강 어귀 화개 쌍계사 대웅전앞 돌계단에 새겨진 안내문이요,
뒤의 것은 안동 병산서원 앞강에 세워져 있는 수영금지 팻말이다.

삭막하고 험한 세상살이에서 한숨을 돌리고 참삶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처럼 정갈하고 쓴 사람의 사랑과 배려가 느껴지는 우리말을
만날 때다.

일산에서 서울로 오는 자유로 끝부분, 가양대교를 건설하느라 차선이
줄어드는 부분엔 이런 안내판이 하나 있다.

"제발 천천히 운행하십시오".

"과속금지" "서행"이라는 명령조 표지판 사이에 외롭게 서있는 이 팻말은
"자유는 없고 짜증만 있다"는 자유로를 잠시나마 미소지으며 지나게 한다.

말과 글은 사람의 생각을 지배한다.

아름답고 고운 말과 문법에 맞고 겸손한 글은 말하고 쓴 사람은 물론이요,
듣고 보는 사람 모두를 정화시킨다.

올해는 세종대왕 탄신 6백돌이 되는 해다.

나흘전 4월7일은 제40회 신문의 날이었다.

한글이 세계 어느나라의 글보다도 아름답고 우수하다는 데는 이론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요즘 우리의 말과 글 쓰임새를 보면 이대로 가다간 21세기
언제쯤인가에는 우리말 자체가 없어지는게 아닐까 싶다.

우리말로 된 간판이나 제품 이름을 찾기 어려운 건 그렇다 치고, 세계화
바람과 함께 너댓살짜리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고 성조기를 걸어놓은 방에서
우리말을 아예 못하게 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뿐인가.

중고생들은 뒷골목 깡패들이나 사용하던 은어를 일상용어로 마구 사용한다.

컴퓨터세대들의 약어 사용은 부모 자식은 물론 형과 아우의 의사소통마저
방해한다.

여자친구를 "깔", "안녕하세요"를 "안녀~"라고 부르고 쓰는 걸 30대이상
어른이 어떻게 알아듣겠는가.

야간자율학습이 "야자"로 통하는 걸 중고생자녀를 뒀거나 둬보지 않은
30대이상세대가 알 재간은 없을 것같다.

혼돈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부모이름도 한자로 못쓰는 사람이 많은 상황에서도 기업체의 사훈과
초중고교의 교훈은 여전히 한자일색이다.

"창의 성실 인화"를 한글로 써놓은 학교나 기업은 거의 없다.

신문과 방송은 또 어떤가.

가로쓰기시대를 맞아 한글전용화를 한다면서도 기사안의 상투적인 한자어
사용은 바뀔 줄 모른다.

"1997년도에는" "서울 부산등지에는"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작금의
현실이다"

같은 뜻의 단어를 겹쳐 써 우리말의 올바른 사용법을 해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앞으로 남북관계의 향방을" "새로 신설하다" "거의 유사하게".

방송도 마찬가지다.

"학교를 가는" 건 보통이고, 상식을 가진 사람은 도저히 쓸 수 없을
은어와 속어, 경어와 격어를 쏟아놓는다.

한글전용론을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경우 한자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 우리말과 글이다.

지구촌시대에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학습에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제대로 된 우리말과 글을 잊고 잃은 뒤에 영어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바르고 고운 우리말과 글이 사라진 시대에 남는 사람들의 심성은 과연
어떻게 될까.

신문과 방송은 일반인의 말과 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한쪽에선 국적불명의 말이 양산되고 신문과 방송은 이를 검증없이
좇아가는가 하면 일본식 표현이 그대로 남아있는 용어를 계속 쓴다면
멀지않아 한글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세종대왕 탄신 6백돌을 맞아 정부에서는 각종 행사를 열고 서울 광화문에
세종대왕 동상을 세운다고 한다.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는 신문의 날인 지난 7일 창립 4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동상을 세우고 기념행사를 갖는 것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참뜻을
기려 올바른 우리말과 글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가로쓰기 한글전용화가 절대명제가 아니라 한글이 21세기 세계의 언어가
되도록 아름답고 훌륭한 우리말과 글 만들기에 앞장서는 것이 마흔번째
신문의 날을 맞은 신문방송인의 마음가짐이 아닐까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