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열전] (15) 절재 김종서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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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는 세종 29년 (1447) 5월1일 의정부와 육조가 세종께 문안드리는
자리에서 우의정 하연과 좌찬성 황보인과 함께 안주 읍성을 본래대로
평안도 절제사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안주는 우리나라의 요충이 되는 곳으로 수나라 군사 백만이 이곳 안주의
살수 (청천강)에서 물고기 밥이 되었다고 전해 오고 있으며 본래
절제사영이 이곳에 있었다.
그런데 영변 약산이 지세가 빼어나고 험하다 하여 그곳으로 옮겼다가
변경의 여진족이 침입한다는 소식에 강계로 다시 옮겼었다.
영변 약산은 지세가 험하고 큰 물 사이에 있어서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기는 쉽지만 또 큰 산과 큰 물에 갇혀서 병사를 움직여 다른 곳을
구원하러 나가기에는 적당치 않다.
안주는 대적이 쳐들어오는 직로상에 있어서 만약 수만의 적병이 먼저
이곳을 점거하여 약산을 고립시키면 대적할 방도가 없으니 이곳으로 다시
절제사영을 옮기고 읍성을 보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윤 4월28일 통사 김행이 본국 출신 환관 장봉의 친상을 알리기
위해 요동에 갔다가 북원의 후예인 달달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탐문하여 보고해왔기 때문에 긴급 논의된 사항이었다.
세종은 이 주장을 받아들여 안주 백성들로 하여금 명년에 장성 쌓는
일을 중단하고 안주읍성 보수하는 일을 전담하게 하고 절제사영을 안주로
옮기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5월 11일에 세종은 왕세자가 이미 모후의 소상과 담제를
거치었으니 이제부터는 예전대로 조참을 받고 매월 초1일과 16일에 조회도
받도록 하라고 예조에 전지한다.
이는 예조판서 정인지가 3년 동안 조참을 받지 않으면 신료들이
해이해질까 두렵다고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사간원에서 매월 4 아일 (5일 11일 21일 25일)에 세자가 조참을
받는 예는 예전부터 있는 것이나 1일과 16일은 큰 조회라서 국왕만이
받을 수 있으므로 이는 옳지 않으니 명령을 철회하라고 청한다.
세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자로 하여금 사정전에 나와
서향하고 앉아서 조회를 받게 하라고 한다.
이에 김종서 등은 초하루와 16일은 임금께 조회를 드리는 날인데
동궁으로 하여금 이를 받게 하면 신하들이 임금께 문안드릴 기회가 없게
되며 사정전은 임금이 정사를 듣는 곳이니 동궁이 비록 서향한다 해도
이곳에 앉을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대한다.
이에 세종도 할 수 없이 김종서 등 의정부 대신들의 의견에 따라 이
명령을 거두어들인다.
그리고 5월14일에는 세종이 우의정 하연과 좌찬성 황보인, 우찬성
김종서, 도승지 황수신을 불러 벼슬과 작위의 제수는 기일을 정해 놓고
하자는 황보인의 의견에 대해 묻는데, 하연은 태종이 "만일 제수할 일이
있으면 매일 인궤를 열어도 좋다"고 한 말을 이끌어 결원이 생기는대로
수시로 메워넣는 것이 좋겠다고 아뢴다.
이에 대해 김종서는 관작의 제수가 빈번하고 잦으면 공정성을 얻기
힘들다는 사실을 당시의 실상으로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직언한다.
"지금의 제수가 공정한 것 같으나 비준이 내리기 전에 사림들이
의논하기를 아무개는 아무개의 친척이고, 아무개는 아무개의 자제이며,
아무개는 아무개의 사사로이 만나는 사람이니 이제 아무 직책의 빈 자리는
아무개가 반드시 하게 되리라 하면 비준이 내린 후에 그 말은 과연 맞게
됩니다.
하나가 빈 곳이 있으면 단망으로 한 사람을 천거하여 메우지 않고
반드시 사람 그릇이 서로 알맞아야 한다고 일컬으면서 이리저리 밀고
당기는데 여기서 세력 있는 자는 하고 싶은 것을 얻을 수 있고 힘없는
자는 반드시 빼앗기게 됩니다.
제수를 빈번하고 자주 할때는 전조 (벼슬을 나눠주는 임무를 담당하는
이조와 병조를 함께 일컫는 명칭)가 이런 비난을 면하려 해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종은 관작의 제수가 공정하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이러한
실상을 김종서에게 듣고 나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듯하다.
그래서 일년동안에 임금이 특명으로 제수하는 것은 10분의1,2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맡은 관청에서 아뢴대로 시행해 왔으며 품계에 따라 행직
(품계가 높으나 관직이 낮으면 관직 앞에 행을 붙인다)과 수직 (품계가
낮으나 관직이 높으면 관직 앞에 수를 붙인다)을 두는 법을 제정하여
예전처럼 전조가 그런 비난을 받지 않고 있는 줄 알았었는데 과연
김종서의 말과 같으며 그밖의 일은 또 없느냐고 묻는다.
김종서는 좀 지나쳤다고 생각했던지 말씀드린대로 이며 또 다른 일은
없다고 하면서 세력있는 자들이 친척을 관리로 선택한다는 말씀일
뿐이라고 다시 한번 확인해 말한다.
자신이 관직 제수에서 친인척을 끌어쓸 수 있는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힘없는 벼슬아치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이와같은 직언을 서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김종서 같은 충의지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세종은 그래서 김종서의 말을 절대 신임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5월22일에는 사헌부에서 뇌물을 주고 받는 폐해를 지적하는
장문의 상소가 올라온다.
지난 윤 4월14일에 제주목사 이흥문이 의정부 대신들과 승정원의
승지들에게 뇌물을 보내려다 적발된 사건으로 말미암아 세종이 동부승지
이계전에게 명하여 이를 지어 바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 내용의 대강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예의염치는 나라의 네 벼릿줄이니 네 벼릿줄이 펼쳐지면 인심이 맑고
정치가 깨끗해져서 그 나라를 밝게 일어나는데 올려놓고, 네 벼릿줄이
느슨해지면 인심이 더럽고 정치가 타락하여 그 나라를 어둠으로 떨어
뜨립니다.
예와 의는 사람을 다스리는 큰 법이 되고 염과 치는 사람을 바로 세우는
큰 마디가 되어 나라 다스리는 근본에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서 그렇습니다.
비록 한 몸으로부터 말한다 해도 예의를 지키고 염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자는 능히 그 안녕과 영화를 보전하여 아름다운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겠지만, 예의를 버리고 염치를 내던진 자는 마침내 화란과 패망에
빠져서 남은 악취가 만세에 흐를 것입니다.
그러니 나라를 가진 자가 국체를 유지하는 도리를 알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선비된 자가 명예와 절의를 갈고 닦는 뜻을 생각하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의 일에서 가히 권장하고 경계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의휴가 노나라 재상이 되었는데 손님이 물고기를 보내거늘 받지 않자
손님이 이르기를 듣자니 그대는 물고기를 좋아한다는데 어찌 받지 않는가.
재상이 이르기를 물고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지금 재상이 되어 능히 물고기를 자급할 수 있는데 이제 물고기를 받고
파면되면 누가 다시 나에게 물고기를 주겠는가.
그러므로 물고기를 받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또 한나라 양진이 동래 태수로 옮겨가면서 창읍을 지나가는데 예전에
무재 (관리 등용시험 과목명)로 과거시켰었던 왕밀이 현령이 되어
있으면서 찾아와 뵙고는 밤이 되자 황금 열 근을 품고 있다가 주거늘
양진이 이르기를 나는 자네를 알아주었거늘 자네는 나를 몰라주니
어째서인가 하며 받지 않자 왕밀이 이르기를 밤이 깊었으니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다.
양진이 이르기를 하늘이 알고 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아는데
어찌 아는 이가 없다고 하는가 하니 왕밀이 부끄러워서 돌아갔다 합니다.
(중략)
진나라 익주자사 이익지는 외척으로 벼슬이 높았으나 장물을 판매한
우두머리로 사사하였고 나머지 태수와 재상으로 죽은 자 40여인이 되니
녹 받는 자들이 두려워 몸둘 바를 모르게 됨에 뇌물 주는 것이 거의
끊어졌었다 합니다.
당나라 이경원은 임금의 총애를 믿고 뇌물을 많이 받았었는데 조사하여
사실을 밝혀내고는 곤장 1백대를 치고 영외로 내쫓았다 합니다.
이와같은 무리들은 욕되게 죽음을 당하고 허물이 후세에까지 미치게
되었으니 어찌 엎어진 수레자국을 경계하듯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동방으로 말하면 고려말기에는 뇌물을 요구하고 뇌물을 쓰는 것을
당연히 여겨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니 모든 관청이 공공연히 청하면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였었습니다.
그래서 사방으로 글을 보내고 앞뒤를 서로 이으니 큰 집안들은 뇌물받는
문호를 크게 열어놓아 재물을 탐하고 벼슬을 파는 것이 풍속을
이루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태조대왕께서 하늘과 사람의 뜻에 따라 혁명을 일으키고
새로 옛 습속을 씻어내어 뇌물 주고 받는 것을 금하는 법을 "육전"에
실으셨고, 태종대왕이 이를 계승하여 기강과 법도를 철저히 바로잡으셨으며
지금 주상전하께서 기업을 이어받으시어 아침 저녁으로 정성을 다하여
날줄 (경)을 세우시고 벼릿줄 (기)을 펼치시니 만개의 그물눈 (만목)이
모두 펼쳐져서 예의가 서고 염치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조의 습속이 아직 다 사라지지 않아서 주현의 수령된 자들이
간혹 대신들에게 뇌물을 보내면, 의리를 생각하고 법을 두려워하여 받지
않는 자도 있고, 쓰다 남은 작은 물건이라 말하며 받는 자도 있으며,
마음으로는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스르지 않으려고 받는 자도 있고,
이것은 드러나게 주는 것이 아니니 누가 알 수 있으랴 하고 달가운
마음으로 받는 자도 있습니다.
대체 미관말직으로서 꾸러미에 꾸린 사소한 물건을 받았다 할지라도
만약 혹시 옳지 않다면 오히려 또 부끄러운 마음을 품어야 할 터인데
하물며 미관말직이 아님에서 이겠습니까.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는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급선무인데
뇌물하는 물건이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면 모두 백성의 기름일 터이니
사랑하여 길러주지는 못할 망정 훑어다가 뇌물하기를 일삼는다면 옳다고
하겠습니까.
저 뇌물 쓰는 사람이 품은 마음은 다른날 벼슬을 구하거나 죄를 면할
바탕을 삼으려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또 그 뇌물을 주는 까닭은 뇌물을 줄 수 있는 상대라고 보고서 주는
것이니, 이를 받은 사람은 군자로 대접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주상전하께서는 굳게 결단력을 발휘하시어 지금
이후부터는 이 금령을 범하는 자는 모두 "육전"과 율문에 따라서 준 자나
받은 자를 엄벌하소서"
세종은 이 상소문의 초안을 김종서 등에게 먼저 보이고 올리게 하였다고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1일자).
자리에서 우의정 하연과 좌찬성 황보인과 함께 안주 읍성을 본래대로
평안도 절제사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안주는 우리나라의 요충이 되는 곳으로 수나라 군사 백만이 이곳 안주의
살수 (청천강)에서 물고기 밥이 되었다고 전해 오고 있으며 본래
절제사영이 이곳에 있었다.
그런데 영변 약산이 지세가 빼어나고 험하다 하여 그곳으로 옮겼다가
변경의 여진족이 침입한다는 소식에 강계로 다시 옮겼었다.
영변 약산은 지세가 험하고 큰 물 사이에 있어서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기는 쉽지만 또 큰 산과 큰 물에 갇혀서 병사를 움직여 다른 곳을
구원하러 나가기에는 적당치 않다.
안주는 대적이 쳐들어오는 직로상에 있어서 만약 수만의 적병이 먼저
이곳을 점거하여 약산을 고립시키면 대적할 방도가 없으니 이곳으로 다시
절제사영을 옮기고 읍성을 보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윤 4월28일 통사 김행이 본국 출신 환관 장봉의 친상을 알리기
위해 요동에 갔다가 북원의 후예인 달달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탐문하여 보고해왔기 때문에 긴급 논의된 사항이었다.
세종은 이 주장을 받아들여 안주 백성들로 하여금 명년에 장성 쌓는
일을 중단하고 안주읍성 보수하는 일을 전담하게 하고 절제사영을 안주로
옮기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5월 11일에 세종은 왕세자가 이미 모후의 소상과 담제를
거치었으니 이제부터는 예전대로 조참을 받고 매월 초1일과 16일에 조회도
받도록 하라고 예조에 전지한다.
이는 예조판서 정인지가 3년 동안 조참을 받지 않으면 신료들이
해이해질까 두렵다고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사간원에서 매월 4 아일 (5일 11일 21일 25일)에 세자가 조참을
받는 예는 예전부터 있는 것이나 1일과 16일은 큰 조회라서 국왕만이
받을 수 있으므로 이는 옳지 않으니 명령을 철회하라고 청한다.
세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자로 하여금 사정전에 나와
서향하고 앉아서 조회를 받게 하라고 한다.
이에 김종서 등은 초하루와 16일은 임금께 조회를 드리는 날인데
동궁으로 하여금 이를 받게 하면 신하들이 임금께 문안드릴 기회가 없게
되며 사정전은 임금이 정사를 듣는 곳이니 동궁이 비록 서향한다 해도
이곳에 앉을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대한다.
이에 세종도 할 수 없이 김종서 등 의정부 대신들의 의견에 따라 이
명령을 거두어들인다.
그리고 5월14일에는 세종이 우의정 하연과 좌찬성 황보인, 우찬성
김종서, 도승지 황수신을 불러 벼슬과 작위의 제수는 기일을 정해 놓고
하자는 황보인의 의견에 대해 묻는데, 하연은 태종이 "만일 제수할 일이
있으면 매일 인궤를 열어도 좋다"고 한 말을 이끌어 결원이 생기는대로
수시로 메워넣는 것이 좋겠다고 아뢴다.
이에 대해 김종서는 관작의 제수가 빈번하고 잦으면 공정성을 얻기
힘들다는 사실을 당시의 실상으로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직언한다.
"지금의 제수가 공정한 것 같으나 비준이 내리기 전에 사림들이
의논하기를 아무개는 아무개의 친척이고, 아무개는 아무개의 자제이며,
아무개는 아무개의 사사로이 만나는 사람이니 이제 아무 직책의 빈 자리는
아무개가 반드시 하게 되리라 하면 비준이 내린 후에 그 말은 과연 맞게
됩니다.
하나가 빈 곳이 있으면 단망으로 한 사람을 천거하여 메우지 않고
반드시 사람 그릇이 서로 알맞아야 한다고 일컬으면서 이리저리 밀고
당기는데 여기서 세력 있는 자는 하고 싶은 것을 얻을 수 있고 힘없는
자는 반드시 빼앗기게 됩니다.
제수를 빈번하고 자주 할때는 전조 (벼슬을 나눠주는 임무를 담당하는
이조와 병조를 함께 일컫는 명칭)가 이런 비난을 면하려 해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종은 관작의 제수가 공정하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이러한
실상을 김종서에게 듣고 나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듯하다.
그래서 일년동안에 임금이 특명으로 제수하는 것은 10분의1,2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맡은 관청에서 아뢴대로 시행해 왔으며 품계에 따라 행직
(품계가 높으나 관직이 낮으면 관직 앞에 행을 붙인다)과 수직 (품계가
낮으나 관직이 높으면 관직 앞에 수를 붙인다)을 두는 법을 제정하여
예전처럼 전조가 그런 비난을 받지 않고 있는 줄 알았었는데 과연
김종서의 말과 같으며 그밖의 일은 또 없느냐고 묻는다.
김종서는 좀 지나쳤다고 생각했던지 말씀드린대로 이며 또 다른 일은
없다고 하면서 세력있는 자들이 친척을 관리로 선택한다는 말씀일
뿐이라고 다시 한번 확인해 말한다.
자신이 관직 제수에서 친인척을 끌어쓸 수 있는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힘없는 벼슬아치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이와같은 직언을 서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김종서 같은 충의지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세종은 그래서 김종서의 말을 절대 신임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5월22일에는 사헌부에서 뇌물을 주고 받는 폐해를 지적하는
장문의 상소가 올라온다.
지난 윤 4월14일에 제주목사 이흥문이 의정부 대신들과 승정원의
승지들에게 뇌물을 보내려다 적발된 사건으로 말미암아 세종이 동부승지
이계전에게 명하여 이를 지어 바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 내용의 대강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예의염치는 나라의 네 벼릿줄이니 네 벼릿줄이 펼쳐지면 인심이 맑고
정치가 깨끗해져서 그 나라를 밝게 일어나는데 올려놓고, 네 벼릿줄이
느슨해지면 인심이 더럽고 정치가 타락하여 그 나라를 어둠으로 떨어
뜨립니다.
예와 의는 사람을 다스리는 큰 법이 되고 염과 치는 사람을 바로 세우는
큰 마디가 되어 나라 다스리는 근본에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서 그렇습니다.
비록 한 몸으로부터 말한다 해도 예의를 지키고 염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자는 능히 그 안녕과 영화를 보전하여 아름다운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겠지만, 예의를 버리고 염치를 내던진 자는 마침내 화란과 패망에
빠져서 남은 악취가 만세에 흐를 것입니다.
그러니 나라를 가진 자가 국체를 유지하는 도리를 알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선비된 자가 명예와 절의를 갈고 닦는 뜻을 생각하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의 일에서 가히 권장하고 경계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의휴가 노나라 재상이 되었는데 손님이 물고기를 보내거늘 받지 않자
손님이 이르기를 듣자니 그대는 물고기를 좋아한다는데 어찌 받지 않는가.
재상이 이르기를 물고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지금 재상이 되어 능히 물고기를 자급할 수 있는데 이제 물고기를 받고
파면되면 누가 다시 나에게 물고기를 주겠는가.
그러므로 물고기를 받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또 한나라 양진이 동래 태수로 옮겨가면서 창읍을 지나가는데 예전에
무재 (관리 등용시험 과목명)로 과거시켰었던 왕밀이 현령이 되어
있으면서 찾아와 뵙고는 밤이 되자 황금 열 근을 품고 있다가 주거늘
양진이 이르기를 나는 자네를 알아주었거늘 자네는 나를 몰라주니
어째서인가 하며 받지 않자 왕밀이 이르기를 밤이 깊었으니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다.
양진이 이르기를 하늘이 알고 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아는데
어찌 아는 이가 없다고 하는가 하니 왕밀이 부끄러워서 돌아갔다 합니다.
(중략)
진나라 익주자사 이익지는 외척으로 벼슬이 높았으나 장물을 판매한
우두머리로 사사하였고 나머지 태수와 재상으로 죽은 자 40여인이 되니
녹 받는 자들이 두려워 몸둘 바를 모르게 됨에 뇌물 주는 것이 거의
끊어졌었다 합니다.
당나라 이경원은 임금의 총애를 믿고 뇌물을 많이 받았었는데 조사하여
사실을 밝혀내고는 곤장 1백대를 치고 영외로 내쫓았다 합니다.
이와같은 무리들은 욕되게 죽음을 당하고 허물이 후세에까지 미치게
되었으니 어찌 엎어진 수레자국을 경계하듯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동방으로 말하면 고려말기에는 뇌물을 요구하고 뇌물을 쓰는 것을
당연히 여겨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니 모든 관청이 공공연히 청하면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였었습니다.
그래서 사방으로 글을 보내고 앞뒤를 서로 이으니 큰 집안들은 뇌물받는
문호를 크게 열어놓아 재물을 탐하고 벼슬을 파는 것이 풍속을
이루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태조대왕께서 하늘과 사람의 뜻에 따라 혁명을 일으키고
새로 옛 습속을 씻어내어 뇌물 주고 받는 것을 금하는 법을 "육전"에
실으셨고, 태종대왕이 이를 계승하여 기강과 법도를 철저히 바로잡으셨으며
지금 주상전하께서 기업을 이어받으시어 아침 저녁으로 정성을 다하여
날줄 (경)을 세우시고 벼릿줄 (기)을 펼치시니 만개의 그물눈 (만목)이
모두 펼쳐져서 예의가 서고 염치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조의 습속이 아직 다 사라지지 않아서 주현의 수령된 자들이
간혹 대신들에게 뇌물을 보내면, 의리를 생각하고 법을 두려워하여 받지
않는 자도 있고, 쓰다 남은 작은 물건이라 말하며 받는 자도 있으며,
마음으로는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스르지 않으려고 받는 자도 있고,
이것은 드러나게 주는 것이 아니니 누가 알 수 있으랴 하고 달가운
마음으로 받는 자도 있습니다.
대체 미관말직으로서 꾸러미에 꾸린 사소한 물건을 받았다 할지라도
만약 혹시 옳지 않다면 오히려 또 부끄러운 마음을 품어야 할 터인데
하물며 미관말직이 아님에서 이겠습니까.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는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급선무인데
뇌물하는 물건이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면 모두 백성의 기름일 터이니
사랑하여 길러주지는 못할 망정 훑어다가 뇌물하기를 일삼는다면 옳다고
하겠습니까.
저 뇌물 쓰는 사람이 품은 마음은 다른날 벼슬을 구하거나 죄를 면할
바탕을 삼으려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또 그 뇌물을 주는 까닭은 뇌물을 줄 수 있는 상대라고 보고서 주는
것이니, 이를 받은 사람은 군자로 대접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주상전하께서는 굳게 결단력을 발휘하시어 지금
이후부터는 이 금령을 범하는 자는 모두 "육전"과 율문에 따라서 준 자나
받은 자를 엄벌하소서"
세종은 이 상소문의 초안을 김종서 등에게 먼저 보이고 올리게 하였다고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