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억원.

그게 도대체 어떻게 모은 돈인데.

18년간 공무원생활의 퇴직금, 첫사업으로 번돈, 아내의 곗돈, 친구
6명에게 빌린돈, 신용보증으로 대출한 돈, 조카에게 빌린돈, 자식들의
돐반지 판 돈.

그야말로 젖먹을 힘까지 다 동원해서 끌어들인 돈이 아닌가.

그 돈을 고스란히 다 날려버리다니.

미래산업의 정문술사장(58)은 더 이상 회사로 출근을 할 수 없었다.

출근해봐야 빚쟁이들의 독촉과 협박에 잠시도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아침부터 소주를 한잔하고 집가까이 있는 청계산으로 향했다.

벌써 며칠째였다.

청계산엔 활엽수가 많아 산속으로 들어가면 어두침침했다.

산속에서 그의 생각은오직 한가지뿐이었다.

"그래, 죽는 수 밖에 없어"

그는 매일 죽어야 겠다는데 몰두했다.

엄두도 못낼 일을 저지른 걸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는 안기부에서 공무원생활을 하다 반도체장비회사를 차렸다.

처음 시작한 반도체검사장비가 약간의 성공을 거두자 욕심을 냈다.

세계 최첨단의 무인 웨이퍼인스펙션 시스템 개발에 나선 것.

이 시스템은 육안으로 반도체를 검색하는 걸 무인자동화로 바꾸기 위한
장치.

미국의 벤처회사와 합작으로 이를 개발키로 하고 18억원이란 돈을
끌어댔다.

미래산업은 메카트로닉스분야를 맡고 미국측은 검색센서를 개발했다.

그러나 개발된 제품은 "육안"보다 4배나 느렸다.

이 개발장비는 완전히 무용지물이되고 말았다.

허탈했다.

개발이 실패했다는 소문이 나돌자 빚쟁이들이 들이닥쳤다.

이제 아무리 후회해도 때는 늦은 상태.

그래서 아침부터 청계산에 올랐다.

오늘은 꼭 죽고 말리라.

그 돈을 어떻게 다 갚을 수 있단 말인가.

회오가 끝없이 몰려왔다.

함께 퇴직한 동료 7명중 사업을 하다 2명은 자살했고 4명은 망했는데
나까지 또 자살을 하는구나.

청계산 중턱 맨땅에 털썩 주저 앉았다.

채권자들의 얼굴이 어른 거렸다.

그래도 조금은 여유를 찾아보자며 고개를 들었다.

이때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는 무릎을 탁 쳤다.

그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18억원을 다날린게 아니잖아.

우리는 그장비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익힌 "기술"이 있잖아.

그 기술은 18억원이 넘을지도 몰라.

맞아.

그는 단숨에 달려 회사로 향했다.

기술자들을 다시 끌어모았다.

당시의 기술로 가능한 반도체검사장비를 만들었다.

미래산업은 지금 90개의 국내외특허를 가진 남부러울게 없는 벤처업체.

종업원 2백50명중 28%가 연구개발팀.

지난해매출 4백54억원에 39%의 경상이익을 내 국내최고의 이익을 기록했다.

이 모든 성과가 바로 생각하나를 바꿔먹으면서 탄생한것.

명화금속의 임정환사장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지난 43년간 오직 나사만을 만들어온 그는 기술개발이 여의치 않자
혼자서 낚시를 하러 나섰다.

낚시터에서 찌를 쳐다보다 갑자기 외쳤다.

"그래, 이거야"

명화금속은 현재 낚시찌모양의 특허품 나사를 연간 3억개씩 만들어
전세계에 수출한다.

자, 이제 오직 한쪽 방향으로만 나아가던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한번
돌려보자.

탁 무릎칠 일이 생길 것이다.

<중소기업 전문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