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점심시간은 "박찬호 타임"이었다.

구내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모든 사람들의 눈과 귀는 국내 모 방송국이
거액의 중계료를 지불하고 보여주는 미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와
뉴욕 메츠의 시즌 1차전 실황경기에 쏠렸다.

겉도는 질문에 겉도는 답변 그래서 속만 터지는 한보청문회는 뒷전이었다.

당당히 LA다저스의 선발투수로 나와 메이저리그 강타자들을 불같은 강속구
로 제압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어쩌다 TV 화면을 가리다가는 당장 뒷사람의 커다란 면박소리를 들어야
했다.

결과도 좋았다.

비록 승리투수가 되진 못했지만 7이닝 1실점으로 뉴욕의 타선을 틀어막아
메이저리그 선발투수로서 자리를 완전히 잡았다는 평가다.

TV와 신문도 앞다퉈 대서특필했다.

그의 활약을 지켜보면서 자부심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아마 한국인이
아닐 것이다.

누구나 "한국의 박찬호" "박찬호=코리아"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본인들이 특이한 투구폼으로 미 메이저리그 진출 첫해에 단숨에
20승 투수가 된 노모 히데오에 열광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의 활약을 코리아의 활약과 동일시하면서 그가 덩치큰 "양키"들을
제압하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것은 일종의 스포츠 국수주의가 아닐까.

노모열풍으로 일본 열도가 떠들썩한 것을 보며 일본인의 미국에 대한
열등감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우스워한 것이 엊그제의 일인데 말이다.

이것은 또 스포츠 사대주의라고도 여겨진다.

한국 프로농구에서 해리스나 워커 등이 최고의 기록을 내며 활약하고 있다
는 것을 아는 미국인들은 과연 몇인가.

그가 정말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인가도 의문이다.

그는 한국의 대표선수이기에 앞서 엄연히 미 프로야구 LA다저스팀의
상품인 것이다.

LA다저스는 전통적인 용병부대로 알려져 있다.

다국적 도시인 LA에서 프로야구로 장사를 하기 위해서는 각 소수민족의
선수들을 스카웃해 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노모 히데오 멕시코의 발렌수엘라 등이 그렇다.

최근 국내 TV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미제 유명 신발광고 역시 그가 미국의
상품임을 설명해 주고 있을 뿐이다.

자랑스런 한국인이긴 하지만 미국의 이익을 위해 뛰고 있다는 것도 사실
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박찬호는 깔끔한 외모와 함께 모자를 벗고 인사할
정도의 깨끗한 매너,그리고 능숙한 영어 구사력 등으로 현지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지난 겨울 모처럼 한국을 방문했을 때 거액을 내고 그의 지도를
받으러 갔던 한국의 어린이 팬들은 외국사 광고출연 등으로 "시간없는"
수퍼스타의 푸대접에 분통을 터뜨려야 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박찬호를 너무나 좋아하지만 언론의 경쟁적인 "영웅 만들기"에 질려서 하는
말이다.

< 김주영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