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싶었습니다] 윤석화 <연극배우> .. '가슴으로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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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5월 뮤지컬 ''명성왕후'' 이후 1년 가까이 휴식을 취했던 연극배우
윤석화(41)씨가 전설의 여간첩 김수임이 되어 돌아왔다.
그는 75년 ''꿀맛''이란 작품으로 데뷔한후 ''신의 아그네스'' ''하나를 위한
이중주'' ''덕혜옹주'' ''명성왕후'' 등 60편의 작품에 출연, 우리나라의 대표적
여배우중 한사람으로 자리잡았다.
돌에 핀 꽃이란 이름처럼 연극계의 척박한 현실에서 찬란한 연기의 꽃을
피운 셈.
관객들은 윤석화란 이름 석자만으로도 기대에 차 공연장을 찾는다.
22년이란 연기생활에서 풍기는 원숙함과 소녀다운 감수성을 함께 지닌
윤씨를 공연연습이 한창인 동숭아트센터에서 만나 그동안의 연기생활과 최근
상황에 대해 들어봤다.
========================================================================
[ 만난사람 = 박성완 < 문화부 기자 > ]
-지난 1년동안 어떻게 생활했습니까.
"남편이 있는 홍콩에서 모처럼 일에서 벗어나 여유있게 지냈어요.
일이란게 시작하면 정신없이 질주해야 하고 원하든 원치 않든 가속이
생기게 마련이죠.
결혼직후 6개월정도 쉰이후 95년부터 96년5월까지 눈코뜰새 없이 바빴어요.
다음작품 준비를 위해 호흡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죠.
아이를 가지려고 무척 애썼지만 그건 뜻대로 되지 않네요"
-올해로 연극무대에 선지 22년짼데 어떤 계기로 연극배우가 됐는지.
"아주 우연히 연극을 시작했어요.
배우란 누구나 한번쯤 동경해 봤을만한 직업이지만 제가 배우가 되리라곤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대학때 CM송을 부른적이 있는데 사무실에서 그당시 민중극단 대표 이효용
선생님을 만났죠.
연극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하길래 나중에 좋은 추억이 될 것같아 시작
했는데 벌써 22년이 지나 여기까지 왔네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데뷔작 "꿀맛"은 오늘날 연극인으로서 제가 있도록 한 작품이기 때문에
각별하게 생각돼요.
"신의 아그네스" 이후의 작품들은 열손가락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 없다고,
하나하나에 애정이 가요.
"신의 아그네스"는 제가 처음으로 선택해서 출연했고 제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계기가 된 작품이라 기억에 남아요.
"하나를 위한 이중주"는 극단산울림의 임영웅선생님과 인연을 맺게 해준
작품이에요.
이후 6년정도 함께 작업했죠.
"목소리"는 첫 모노드라마라서 기억에 남고..."
-22년간의 연기생활동안 가장 힘들었던 순간과 가장 기뻤던 순간이 있다면.
"작품이 잘 안풀리면 정말 속상하고 그만 둬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그럴때면 지옥에 있는 기분이랄까.
이렇게 힘들 때마다 나를 끌어준 힘은 관객들이에요.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소리, 연극을 보고자 하는 뜨거운 눈과 가슴을
접할때면 힘들어도 할만한 가치있는 일이구나 보람을 느끼고 힘을 얻죠.
가장 기뻤던 순간이라면 92년 "딸에게 보내는 편지" 공연이 끝나고 전체
기립박수를 받았을 때이에요.
정말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라는 느낌이 전해지더군요"
-덕혜옹주 명성왕후 김수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역사속 인물들을 연기해
왔는데 우연입니까.
"연극에 대한 책임감이랄까.
사건이든 인물이든 역사적 사실을 무대위로 끌어올리는 일을 숙제처럼
여겨 왔어요.
역사는 현실의 거울이라고 하잖아요.
창작극을 통해 역사를 재현하는 것은 만만치 않지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제 나름대로 하고 싶었던 일이니 우연은 아니겠죠"
-연극 "나, 김수임"이 29일부터 공연되는데 김수임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을
한다면.
"대본에도 나오듯 "사상의 격랑을 덧없이 떠내려간 이파리"라고 생각해요.
사랑 때문에 간첩죄에 해당하는 일을 저지른 거죠.
프로스파이라기보다 이데올로기대립이 첨예하던 시기의 희생양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 같아요.
김수임처럼 똑똑하고 예지있는 여성이 지금 태어났다면 그처럼 불행한
상황에 처하지 않았을테죠"
-김수임이라는 역할을 완벽히 소화해 내기 위해 머리모양등 하나하나에
세심하게 신경쓴다는데.
"내적인 것은 연습과 스터디를 통해 걸러지고 다듬어질수 있어요.
때론 스스로 최면을 걸기도 하죠.
관객들은 가슴으로 연기를 감상하는 한편 눈으로 배우들을 보기 때문에
외면도 중요해요.
특히 실존인물을 재현하는 경우엔 극중인물의 이미지가 배우몸에
붙어야지요.
-관객장악력이나 흡입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많이 듣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디에 이유가 있다고 보는지.
"배우는 재능도 중요하지만 무대를 가장 편안하다고 느끼고 무대의 주인이
돼야해요.
어느정도 연륜이 쌓여야죠.
땅에 씨를 뿌리고 꽃이 피어나는 것을 기다리는 열정과 정성으로 무대에
서면 관객들은 그 느낌을 전해 받습니다.
제게 특별한 표현기술이 있는 것은 아니예요"
-결혼후 생활이 안정되면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안정감이 연기에 도움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한사람의 여자로서 행복함을 느끼다가도 배우로서의 감성이 줄고
게을러지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죠.
연극은 몰입을 요구해요"
-2년전에 만든 "돌꽃컴퍼니"의 현재 활동은 어떤지.
"만화영화 "홍길동" 제작으로 경제적인 타격을 상당히 받았어요.
"돌꽃컴퍼니"를 만든 이유는 큰사업을 하겠다는 것보다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 울타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인데..
"홍길동"은 어린이연극을 하지 못하는걸 늘 미안하게 여겼기 때문에
만들었어요.
막연한 꿈을 갖고 시작했는데 현실과는 큰 괴리가 있더군요.
요즘은 외국판매 등 "홍길동" 뒷마무리만 하고 새 일은 벌이지 않고
있어요"
-앞으로의 계획은.
"죽을때까지 배우로 남고 싶어요.
정말로 좋은 작품을 영화나 TV에 남기고 싶다는 욕심도 있구요.
올 상반기엔 김수임에만 몰입할래요.
9월엔 세계연극제 개막공연인 "리어왕"에 한국측 여배우로 참가할 예정이고,
구히서씨 작품인 "황진이"를 희랍비극형식으로 무대에 올리고 싶어요.
우리소리를 담은 코러스를 등장시키는 거죠"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2일자).
윤석화(41)씨가 전설의 여간첩 김수임이 되어 돌아왔다.
그는 75년 ''꿀맛''이란 작품으로 데뷔한후 ''신의 아그네스'' ''하나를 위한
이중주'' ''덕혜옹주'' ''명성왕후'' 등 60편의 작품에 출연, 우리나라의 대표적
여배우중 한사람으로 자리잡았다.
돌에 핀 꽃이란 이름처럼 연극계의 척박한 현실에서 찬란한 연기의 꽃을
피운 셈.
관객들은 윤석화란 이름 석자만으로도 기대에 차 공연장을 찾는다.
22년이란 연기생활에서 풍기는 원숙함과 소녀다운 감수성을 함께 지닌
윤씨를 공연연습이 한창인 동숭아트센터에서 만나 그동안의 연기생활과 최근
상황에 대해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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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난사람 = 박성완 < 문화부 기자 > ]
-지난 1년동안 어떻게 생활했습니까.
"남편이 있는 홍콩에서 모처럼 일에서 벗어나 여유있게 지냈어요.
일이란게 시작하면 정신없이 질주해야 하고 원하든 원치 않든 가속이
생기게 마련이죠.
결혼직후 6개월정도 쉰이후 95년부터 96년5월까지 눈코뜰새 없이 바빴어요.
다음작품 준비를 위해 호흡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죠.
아이를 가지려고 무척 애썼지만 그건 뜻대로 되지 않네요"
-올해로 연극무대에 선지 22년짼데 어떤 계기로 연극배우가 됐는지.
"아주 우연히 연극을 시작했어요.
배우란 누구나 한번쯤 동경해 봤을만한 직업이지만 제가 배우가 되리라곤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대학때 CM송을 부른적이 있는데 사무실에서 그당시 민중극단 대표 이효용
선생님을 만났죠.
연극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하길래 나중에 좋은 추억이 될 것같아 시작
했는데 벌써 22년이 지나 여기까지 왔네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데뷔작 "꿀맛"은 오늘날 연극인으로서 제가 있도록 한 작품이기 때문에
각별하게 생각돼요.
"신의 아그네스" 이후의 작품들은 열손가락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 없다고,
하나하나에 애정이 가요.
"신의 아그네스"는 제가 처음으로 선택해서 출연했고 제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계기가 된 작품이라 기억에 남아요.
"하나를 위한 이중주"는 극단산울림의 임영웅선생님과 인연을 맺게 해준
작품이에요.
이후 6년정도 함께 작업했죠.
"목소리"는 첫 모노드라마라서 기억에 남고..."
-22년간의 연기생활동안 가장 힘들었던 순간과 가장 기뻤던 순간이 있다면.
"작품이 잘 안풀리면 정말 속상하고 그만 둬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그럴때면 지옥에 있는 기분이랄까.
이렇게 힘들 때마다 나를 끌어준 힘은 관객들이에요.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소리, 연극을 보고자 하는 뜨거운 눈과 가슴을
접할때면 힘들어도 할만한 가치있는 일이구나 보람을 느끼고 힘을 얻죠.
가장 기뻤던 순간이라면 92년 "딸에게 보내는 편지" 공연이 끝나고 전체
기립박수를 받았을 때이에요.
정말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라는 느낌이 전해지더군요"
-덕혜옹주 명성왕후 김수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역사속 인물들을 연기해
왔는데 우연입니까.
"연극에 대한 책임감이랄까.
사건이든 인물이든 역사적 사실을 무대위로 끌어올리는 일을 숙제처럼
여겨 왔어요.
역사는 현실의 거울이라고 하잖아요.
창작극을 통해 역사를 재현하는 것은 만만치 않지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제 나름대로 하고 싶었던 일이니 우연은 아니겠죠"
-연극 "나, 김수임"이 29일부터 공연되는데 김수임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을
한다면.
"대본에도 나오듯 "사상의 격랑을 덧없이 떠내려간 이파리"라고 생각해요.
사랑 때문에 간첩죄에 해당하는 일을 저지른 거죠.
프로스파이라기보다 이데올로기대립이 첨예하던 시기의 희생양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 같아요.
김수임처럼 똑똑하고 예지있는 여성이 지금 태어났다면 그처럼 불행한
상황에 처하지 않았을테죠"
-김수임이라는 역할을 완벽히 소화해 내기 위해 머리모양등 하나하나에
세심하게 신경쓴다는데.
"내적인 것은 연습과 스터디를 통해 걸러지고 다듬어질수 있어요.
때론 스스로 최면을 걸기도 하죠.
관객들은 가슴으로 연기를 감상하는 한편 눈으로 배우들을 보기 때문에
외면도 중요해요.
특히 실존인물을 재현하는 경우엔 극중인물의 이미지가 배우몸에
붙어야지요.
-관객장악력이나 흡입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많이 듣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디에 이유가 있다고 보는지.
"배우는 재능도 중요하지만 무대를 가장 편안하다고 느끼고 무대의 주인이
돼야해요.
어느정도 연륜이 쌓여야죠.
땅에 씨를 뿌리고 꽃이 피어나는 것을 기다리는 열정과 정성으로 무대에
서면 관객들은 그 느낌을 전해 받습니다.
제게 특별한 표현기술이 있는 것은 아니예요"
-결혼후 생활이 안정되면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안정감이 연기에 도움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한사람의 여자로서 행복함을 느끼다가도 배우로서의 감성이 줄고
게을러지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죠.
연극은 몰입을 요구해요"
-2년전에 만든 "돌꽃컴퍼니"의 현재 활동은 어떤지.
"만화영화 "홍길동" 제작으로 경제적인 타격을 상당히 받았어요.
"돌꽃컴퍼니"를 만든 이유는 큰사업을 하겠다는 것보다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 울타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인데..
"홍길동"은 어린이연극을 하지 못하는걸 늘 미안하게 여겼기 때문에
만들었어요.
막연한 꿈을 갖고 시작했는데 현실과는 큰 괴리가 있더군요.
요즘은 외국판매 등 "홍길동" 뒷마무리만 하고 새 일은 벌이지 않고
있어요"
-앞으로의 계획은.
"죽을때까지 배우로 남고 싶어요.
정말로 좋은 작품을 영화나 TV에 남기고 싶다는 욕심도 있구요.
올 상반기엔 김수임에만 몰입할래요.
9월엔 세계연극제 개막공연인 "리어왕"에 한국측 여배우로 참가할 예정이고,
구히서씨 작품인 "황진이"를 희랍비극형식으로 무대에 올리고 싶어요.
우리소리를 담은 코러스를 등장시키는 거죠"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