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인터뷰] 김수환 <추기경>에게 듣는다..'혼란시국' 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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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추기경(75).
숨가쁜 역사의 고비마다 성직자로서의 양심에 따라 겨레의 아픔을
온몸으로 껴안아 온 "우리시대의 양심".
추락하는 한국경제와 한보사태, 현철씨 문제등으로 얼룩진 현실을 보며
추기경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오늘의 "고난주간"이 지나면 "부활의 미래"가 펼쳐질 것인가.
활짝 핀 개나리꽃 사이로 농성근로자들의 플래카드가 어지러운 서울
명동성당에서 김추기경을 만났다.
추기경은 보일듯 말듯 온화한 미소를 띤 채 "나라가 혼란스러울수록
국민 모두가 냉정해져야 한다"며 "정직과 성실이 나라를 살리고 참다운
사랑이 인류를 구원한다"는 진리를 들려줬다.
====================================================================
<대담 = 박성희 문화부장>
-건강해 보이십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 김추기경 =낮엔 사람들 만나느라 바쁘고 밤에는 강론 준비도 하고 책도
읽습니다.
밤 12시쯤 자고 아침 6시에 일어납니다.
-한보사태와 현철씨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얼마전 이럴 때일수록 냉정을 찾아 힘을 모으자고 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최근 시국을 어떻게 진단하십니까.
<> 김추기경 =모두들 한보사태의 노예가 된 것같아요.
진실이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밝혀져야 하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성을 잃고 한쪽으로만 몰아가다 보면 엄청난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냉정해져야 합니다.
미국의 경우 클린턴대통령은 주지사 시절 스캔들로 재판을 받으면서도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우리는 너무 흥분하고 있어요.
일단 검찰에 맡겼으면 지켜 봐야지요.
청문회도 국회의원들이 스타의식이나 당리당략을 앞세우면 안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나라 경제가 엉망이라고 합니다.
이 상태로 가면 온 국민이 위기에 빠질 거라고도 하는데요.
어떻게 해야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 김추기경 =부활절 메시지에서도 밝혔지만 물질만능 풍조와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애국애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경제살리기"의 필요성은 모두 절감하면서도 나부터 앞장서겠다는 의식이
부족합니다.
최근 기업들이 "노사는 하나다"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화합을 강조하고
근로자들도 임금인상을 자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소식은 희망을
줍니다.
단 이런 운동이 이어지려면 경영자들이 솔선수범해 노동자들이 "우리만
희생당했다"는 느낌을 갖지 않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이익이 늘면 곧 노동자들에게 되돌려 줘 위화감을 갖지 않도록 하는게
중요해요.
-우리 민족에겐 저력이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 김추기경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서 우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한편으로 칭찬도 했어요.
분단과 전쟁으로 황폐해진데다 부존자원도 없는 악조건속에서 이처럼
성장한 건 기적이라는 거지요.
30여년만에 국민소득 80달러에서 1만달러를 이룩한 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게 우리민족의 힘입니다.
우리 모두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을 가져야 해요.
결속력이란 단점을 반성하고 서로 힘을 모으는 데서 나옵니다.
-북한동포 돕기가 사회적인 과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만 막상 식량을
보내자는 움직임은 그다지 활발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보낸 식량이 군량미로 전용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있구요.
<> 김추기경 =굶어죽은 시체가 실려가는 사진을 보고 정말 가슴이
아팠어요.
우리에게 뜻만 있으면 그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린 아직 소극적이에요.
군량미라도 좋으니 쌀을 보내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배고픈 군인들이 난데없는 쌀을 보면 남쪽에서 온 건줄 결국 알게
될거라는 얘기죠.
쌀을 준 사람에게 총부리를 들이댈 수는 없지 않겠어요.
동포의 굶주림을 외면하는 이기심으로 어떻게 통일을 이루겠습니까.
-연변동포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계신 걸로 압니다만.
<> 김추기경 =얼마전 조선족 사기사건 피해자의 대표격인 연변의
이영석씨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어요.
취업사기에 휘말린 연변동포가 3만명이나 된다는 거예요.
사회단체의 산발적인 지원이 있었지만 정부 차원의 해답은 아직 없다면서
어떻게든 한국에 올 수 있도록 해달라는 편지였습니다.
그들을 울린 건 결국 우리입니다.
-사회 전체에 "나만 잘살면 된다"라는 이기심이 팽배해 있는 듯합니다.
한보사태도 그로 인해 생긴 비극 아니겠습니까.
한곳에선 명예퇴직이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쫓겨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데 다른쪽에서는 여전히 흥청거리고 있습니다.
이웃을 생각하고 절제하는 마음,씀씀이를 줄이는 운동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 김추기경 =그동안 수많은 사회운동이 있었지만 큰 결실을 얻지 못한채
중도에 흐지부지됐어요.
보다 중요한 건 가정에서부터 출발돼야 합니다.
자라는 아이들에게 교육을 제대로 시켜야 사회가 변할 수 있다고
봅니다.
-자녀교육을 담당하는 여성들이 앞장서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 김추기경 =그렇습니다.
얼마전 이화여대 관계자와 만난 자리에서 규모만 자랑하지 말고
우리사회의 가치관을 변화시킬 여성운동에 앞장서 달라고 말했습니다.
대학이 앞장서면 동문들을 통해 사회로 확산되고 결국 나라 전체가
달라질 거예요.
아이들에게 음식을 남겨 버리지 않도록 하는 일부터 남을 생각하는
일까지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왕자"나 "공주"로 키운 아이들은 성장한 뒤 아무에게도 다스려지지
않고 자신도 불행해지죠.
독일에서 살 때 보니까 어머니들이 식탁예절 등 일상생활 교육을 엄격하게
시키더군요.
아이들도 잘 따르고.우린 해달라는대로 다 해주면서 정작 규제가 필요한
분야는 방치해 버립니다.
사교육비를 엄청나게 쏟아부으면서 말예요.
-사교육비문제는 정말 심각합니다.
그 때문에 금전적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 김추기경 =아내로부터 닥달당하면 남자들은 자괴감에 빠지고 기가 꺾여
자식앞에서도 떳떳하지 못해집니다.
그만큼 돈의 유혹에도 눈멀기 쉽지요.
어머니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문제입니다.
한보사태도 손가락질만 할게 아니지요.
가치관 부재가 빚은 일이니까요.
이번 사태를 황금만능주의에 젖어 부정부패에 둔감해진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기독교계에서는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대희년을 맞는 크리스천의 자세와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하는지요.
<> 김추기경 =2000년은 대희년뿐만 아니라 20세기가 끝나고 새로운 세기를
맞는 전환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지요.
보다 나은 세계를 꿈꾸는 우리로서 더 밝고 정의롭고 아름다운 인간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억압과 오류로부터 해방되는 참된 자유의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하지만 해방과 자유는 과학이나 이념, 돈으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진실한 해방과 자유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한 하나님 말씀에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리다"라고 하셨어요.
우리를 보다 인간답게 해주는 길이며 생명이고 진리이신 그 분을 알고
사랑하고 따르는 마음을 갖는 것이 대희년을 맞는 기독교인의 자세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를 합쳐 크리스천이 모두 1천만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그중에 예수님을 닮아 진실로 이웃을 사랑할줄 아는 사람이
1백만명만 돼도 우리사회는 달라질 것입니다.
-스스로 모범을 보이기보다 남이 앞장서주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은게
현실입니다.
참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늘어나려면 어떤 지침이 필요할는지요.
<> 김추기경 =난 늘 이렇게 호소합니다.
정직한 사람이 되자. 성실하자. 정직과 성실을 갖추면 전세계가 우리를
인정하게 됩니다.
세계화시대의 경쟁력이란 무엇입니까.
첨단기술 외국어실력 현대적 노하우 등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한국인은 정직하고 성실하다"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일입니다.
사람을 믿으면 상품도 신뢰하게 됩니다.
국가경쟁력도 마찬가지지요.
또 하나는 이웃사랑입니다.
북한동포 돕기도 이웃사랑의 마음만 있으면 어려울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적십자사에 접수된 북한동포돕기성금을 보니 가톨릭계가
6억원으로 가장 많더군요.
올해에는 얼마나 모금할 계획입니까.
<> 김추기경 =옥수수 10만t을 보낼 예정인데 급한대로 1만t을 곧 전달할
생각입니다.
1만t 보내는데 13억원이 필요하다는군요.
-사제지망생이 줄어든다죠.
<> 김추기경 =어렵고 위험하고 더러운 일을 싫어하는 3D 기피현상의
영향입니다.
신부는 희생정신을 지녀야 하는데 어릴 때부터 희생과 거리가 먼 교육을
시키니 누가 지망하겠어요.
전엔 미사를 마친 뒤 청소년들과 사진을 찍으면서 "신부되고 싶은 사람은
손들어보라"고 하면 손드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지금은 2~3명에 불과해요.
-교단 차원에서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요.
<> 김추기경 =아직은 공급부족 상태는 아닙니다.
유럽이나 미국도 사제지망생이 줄어드는 건 마찬가지예요.
대신 평신도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으니 다행이지요.
-종교서적 외에는 무슨 책을 즐겨 읽으시는지요.
<> 김추기경 =고루 봅니다.
김정현씨의 소설 "아버지"도 읽었고 귀순한 이순옥씨의 책도 봤구요.
시카고의 베르나르덴 추기경이 죽기전 3개월동안 병상에서 쓴 책 "평화의
선물"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죽음은 고통과 불안을 동반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하나님과 참된 생명의
품속으로 옮겨가는 관문이지요.
"가장 위대한 선물"이라는 책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죽음은 자기를 되돌아보고 마지막 날까지 "봉사할 게 더 없나, 참으로
사랑해야지"하는 깨달음을 얻게 하는 선물입니다.
-잊혀지지 않는 일도 많으시죠.
<> 김추기경 =개인적으로는 신부가 된 날을 잊을수 없구요.
사회적으로는 광주사태때 사형선고 받은 세사람을 감형시키고 사면받게
한 과정이 오래 남습니다.
명동성당에는 지금도 원진레이온 피해자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어요.
늘 계엄령하에 있는 거지요.
호주사람들은 국회의사당에서 데모한다는데 우린 왜 여기로만 오는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막지 않고 따뜻하게 대해주시니까 믿고 찾아 오는거지요.
<> 김추기경 =안잡혀간다는 것때문에 무작정 와요.
사제나 성당에 사는 사람들이 종종 경찰과 농성자로부터 이중 검문을
받습니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십니까.
<> 김추기경 =비결은 없어요.
많이 걷는 것밖에.
1주일에 한번 신부 수녀들과 북한산에 오르지요.
-올해가 정년이신데..
<> 김추기경 =정년이 되면 교황청에 사표를 냅니다.
교황께서 받아들여야 하는데 금방 하실지 얼마간 기다리게 할지는
모르겠어요.
-은퇴하신 뒤의 계획은 세우셨는지요.
<> 김추기경 =우선 운전면허를 딸 작정이에요.
그래서 마음 가는대로 달리고 싶습니다.
김삿갓처럼 무전여행을 하고 싶은데 요즘 세상에 그렇게는 안될테고,
얼굴이 많이 팔려서(?).
남은 생애동안 사제로서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좀더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며 살려고 합니다.
-신부님들은 약주를 좀 하시죠.
추기경님은 얼마나 드십니까.
<> 김추기경 =종류에 관계없이 한잔이에요.
마시고 싶은데 잘 못하니까.
술 잘하는 신부 보면 부러워요.
사람 만났을 때 맹숭맹숭한 것보다 한잔 하면서 얘기하면 좋은데.
예수님도 술을 드셨어요.
-한달 용돈은 얼마나 쓰십니까.
혹시 월급을 받으시는지요.
<> 김추기경 =개인적으로 쓰는 돈은 거의 없어요.
월급은 원래 없었는데 세금을 내기 위해 80만원정도 받습니다.
그 정도 돼야 세금을 낸다고 해서요.
< 정리=고두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4일자).
숨가쁜 역사의 고비마다 성직자로서의 양심에 따라 겨레의 아픔을
온몸으로 껴안아 온 "우리시대의 양심".
추락하는 한국경제와 한보사태, 현철씨 문제등으로 얼룩진 현실을 보며
추기경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오늘의 "고난주간"이 지나면 "부활의 미래"가 펼쳐질 것인가.
활짝 핀 개나리꽃 사이로 농성근로자들의 플래카드가 어지러운 서울
명동성당에서 김추기경을 만났다.
추기경은 보일듯 말듯 온화한 미소를 띤 채 "나라가 혼란스러울수록
국민 모두가 냉정해져야 한다"며 "정직과 성실이 나라를 살리고 참다운
사랑이 인류를 구원한다"는 진리를 들려줬다.
====================================================================
<대담 = 박성희 문화부장>
-건강해 보이십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 김추기경 =낮엔 사람들 만나느라 바쁘고 밤에는 강론 준비도 하고 책도
읽습니다.
밤 12시쯤 자고 아침 6시에 일어납니다.
-한보사태와 현철씨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얼마전 이럴 때일수록 냉정을 찾아 힘을 모으자고 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최근 시국을 어떻게 진단하십니까.
<> 김추기경 =모두들 한보사태의 노예가 된 것같아요.
진실이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밝혀져야 하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성을 잃고 한쪽으로만 몰아가다 보면 엄청난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냉정해져야 합니다.
미국의 경우 클린턴대통령은 주지사 시절 스캔들로 재판을 받으면서도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우리는 너무 흥분하고 있어요.
일단 검찰에 맡겼으면 지켜 봐야지요.
청문회도 국회의원들이 스타의식이나 당리당략을 앞세우면 안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나라 경제가 엉망이라고 합니다.
이 상태로 가면 온 국민이 위기에 빠질 거라고도 하는데요.
어떻게 해야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 김추기경 =부활절 메시지에서도 밝혔지만 물질만능 풍조와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애국애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경제살리기"의 필요성은 모두 절감하면서도 나부터 앞장서겠다는 의식이
부족합니다.
최근 기업들이 "노사는 하나다"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화합을 강조하고
근로자들도 임금인상을 자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소식은 희망을
줍니다.
단 이런 운동이 이어지려면 경영자들이 솔선수범해 노동자들이 "우리만
희생당했다"는 느낌을 갖지 않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이익이 늘면 곧 노동자들에게 되돌려 줘 위화감을 갖지 않도록 하는게
중요해요.
-우리 민족에겐 저력이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 김추기경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서 우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한편으로 칭찬도 했어요.
분단과 전쟁으로 황폐해진데다 부존자원도 없는 악조건속에서 이처럼
성장한 건 기적이라는 거지요.
30여년만에 국민소득 80달러에서 1만달러를 이룩한 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게 우리민족의 힘입니다.
우리 모두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을 가져야 해요.
결속력이란 단점을 반성하고 서로 힘을 모으는 데서 나옵니다.
-북한동포 돕기가 사회적인 과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만 막상 식량을
보내자는 움직임은 그다지 활발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보낸 식량이 군량미로 전용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있구요.
<> 김추기경 =굶어죽은 시체가 실려가는 사진을 보고 정말 가슴이
아팠어요.
우리에게 뜻만 있으면 그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린 아직 소극적이에요.
군량미라도 좋으니 쌀을 보내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배고픈 군인들이 난데없는 쌀을 보면 남쪽에서 온 건줄 결국 알게
될거라는 얘기죠.
쌀을 준 사람에게 총부리를 들이댈 수는 없지 않겠어요.
동포의 굶주림을 외면하는 이기심으로 어떻게 통일을 이루겠습니까.
-연변동포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계신 걸로 압니다만.
<> 김추기경 =얼마전 조선족 사기사건 피해자의 대표격인 연변의
이영석씨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어요.
취업사기에 휘말린 연변동포가 3만명이나 된다는 거예요.
사회단체의 산발적인 지원이 있었지만 정부 차원의 해답은 아직 없다면서
어떻게든 한국에 올 수 있도록 해달라는 편지였습니다.
그들을 울린 건 결국 우리입니다.
-사회 전체에 "나만 잘살면 된다"라는 이기심이 팽배해 있는 듯합니다.
한보사태도 그로 인해 생긴 비극 아니겠습니까.
한곳에선 명예퇴직이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쫓겨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데 다른쪽에서는 여전히 흥청거리고 있습니다.
이웃을 생각하고 절제하는 마음,씀씀이를 줄이는 운동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 김추기경 =그동안 수많은 사회운동이 있었지만 큰 결실을 얻지 못한채
중도에 흐지부지됐어요.
보다 중요한 건 가정에서부터 출발돼야 합니다.
자라는 아이들에게 교육을 제대로 시켜야 사회가 변할 수 있다고
봅니다.
-자녀교육을 담당하는 여성들이 앞장서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 김추기경 =그렇습니다.
얼마전 이화여대 관계자와 만난 자리에서 규모만 자랑하지 말고
우리사회의 가치관을 변화시킬 여성운동에 앞장서 달라고 말했습니다.
대학이 앞장서면 동문들을 통해 사회로 확산되고 결국 나라 전체가
달라질 거예요.
아이들에게 음식을 남겨 버리지 않도록 하는 일부터 남을 생각하는
일까지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왕자"나 "공주"로 키운 아이들은 성장한 뒤 아무에게도 다스려지지
않고 자신도 불행해지죠.
독일에서 살 때 보니까 어머니들이 식탁예절 등 일상생활 교육을 엄격하게
시키더군요.
아이들도 잘 따르고.우린 해달라는대로 다 해주면서 정작 규제가 필요한
분야는 방치해 버립니다.
사교육비를 엄청나게 쏟아부으면서 말예요.
-사교육비문제는 정말 심각합니다.
그 때문에 금전적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 김추기경 =아내로부터 닥달당하면 남자들은 자괴감에 빠지고 기가 꺾여
자식앞에서도 떳떳하지 못해집니다.
그만큼 돈의 유혹에도 눈멀기 쉽지요.
어머니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문제입니다.
한보사태도 손가락질만 할게 아니지요.
가치관 부재가 빚은 일이니까요.
이번 사태를 황금만능주의에 젖어 부정부패에 둔감해진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기독교계에서는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대희년을 맞는 크리스천의 자세와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하는지요.
<> 김추기경 =2000년은 대희년뿐만 아니라 20세기가 끝나고 새로운 세기를
맞는 전환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지요.
보다 나은 세계를 꿈꾸는 우리로서 더 밝고 정의롭고 아름다운 인간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억압과 오류로부터 해방되는 참된 자유의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하지만 해방과 자유는 과학이나 이념, 돈으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진실한 해방과 자유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한 하나님 말씀에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리다"라고 하셨어요.
우리를 보다 인간답게 해주는 길이며 생명이고 진리이신 그 분을 알고
사랑하고 따르는 마음을 갖는 것이 대희년을 맞는 기독교인의 자세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를 합쳐 크리스천이 모두 1천만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그중에 예수님을 닮아 진실로 이웃을 사랑할줄 아는 사람이
1백만명만 돼도 우리사회는 달라질 것입니다.
-스스로 모범을 보이기보다 남이 앞장서주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은게
현실입니다.
참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늘어나려면 어떤 지침이 필요할는지요.
<> 김추기경 =난 늘 이렇게 호소합니다.
정직한 사람이 되자. 성실하자. 정직과 성실을 갖추면 전세계가 우리를
인정하게 됩니다.
세계화시대의 경쟁력이란 무엇입니까.
첨단기술 외국어실력 현대적 노하우 등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한국인은 정직하고 성실하다"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일입니다.
사람을 믿으면 상품도 신뢰하게 됩니다.
국가경쟁력도 마찬가지지요.
또 하나는 이웃사랑입니다.
북한동포 돕기도 이웃사랑의 마음만 있으면 어려울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적십자사에 접수된 북한동포돕기성금을 보니 가톨릭계가
6억원으로 가장 많더군요.
올해에는 얼마나 모금할 계획입니까.
<> 김추기경 =옥수수 10만t을 보낼 예정인데 급한대로 1만t을 곧 전달할
생각입니다.
1만t 보내는데 13억원이 필요하다는군요.
-사제지망생이 줄어든다죠.
<> 김추기경 =어렵고 위험하고 더러운 일을 싫어하는 3D 기피현상의
영향입니다.
신부는 희생정신을 지녀야 하는데 어릴 때부터 희생과 거리가 먼 교육을
시키니 누가 지망하겠어요.
전엔 미사를 마친 뒤 청소년들과 사진을 찍으면서 "신부되고 싶은 사람은
손들어보라"고 하면 손드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지금은 2~3명에 불과해요.
-교단 차원에서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요.
<> 김추기경 =아직은 공급부족 상태는 아닙니다.
유럽이나 미국도 사제지망생이 줄어드는 건 마찬가지예요.
대신 평신도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으니 다행이지요.
-종교서적 외에는 무슨 책을 즐겨 읽으시는지요.
<> 김추기경 =고루 봅니다.
김정현씨의 소설 "아버지"도 읽었고 귀순한 이순옥씨의 책도 봤구요.
시카고의 베르나르덴 추기경이 죽기전 3개월동안 병상에서 쓴 책 "평화의
선물"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죽음은 고통과 불안을 동반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하나님과 참된 생명의
품속으로 옮겨가는 관문이지요.
"가장 위대한 선물"이라는 책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죽음은 자기를 되돌아보고 마지막 날까지 "봉사할 게 더 없나, 참으로
사랑해야지"하는 깨달음을 얻게 하는 선물입니다.
-잊혀지지 않는 일도 많으시죠.
<> 김추기경 =개인적으로는 신부가 된 날을 잊을수 없구요.
사회적으로는 광주사태때 사형선고 받은 세사람을 감형시키고 사면받게
한 과정이 오래 남습니다.
명동성당에는 지금도 원진레이온 피해자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어요.
늘 계엄령하에 있는 거지요.
호주사람들은 국회의사당에서 데모한다는데 우린 왜 여기로만 오는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막지 않고 따뜻하게 대해주시니까 믿고 찾아 오는거지요.
<> 김추기경 =안잡혀간다는 것때문에 무작정 와요.
사제나 성당에 사는 사람들이 종종 경찰과 농성자로부터 이중 검문을
받습니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십니까.
<> 김추기경 =비결은 없어요.
많이 걷는 것밖에.
1주일에 한번 신부 수녀들과 북한산에 오르지요.
-올해가 정년이신데..
<> 김추기경 =정년이 되면 교황청에 사표를 냅니다.
교황께서 받아들여야 하는데 금방 하실지 얼마간 기다리게 할지는
모르겠어요.
-은퇴하신 뒤의 계획은 세우셨는지요.
<> 김추기경 =우선 운전면허를 딸 작정이에요.
그래서 마음 가는대로 달리고 싶습니다.
김삿갓처럼 무전여행을 하고 싶은데 요즘 세상에 그렇게는 안될테고,
얼굴이 많이 팔려서(?).
남은 생애동안 사제로서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좀더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며 살려고 합니다.
-신부님들은 약주를 좀 하시죠.
추기경님은 얼마나 드십니까.
<> 김추기경 =종류에 관계없이 한잔이에요.
마시고 싶은데 잘 못하니까.
술 잘하는 신부 보면 부러워요.
사람 만났을 때 맹숭맹숭한 것보다 한잔 하면서 얘기하면 좋은데.
예수님도 술을 드셨어요.
-한달 용돈은 얼마나 쓰십니까.
혹시 월급을 받으시는지요.
<> 김추기경 =개인적으로 쓰는 돈은 거의 없어요.
월급은 원래 없었는데 세금을 내기 위해 80만원정도 받습니다.
그 정도 돼야 세금을 낸다고 해서요.
< 정리=고두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