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업가가 공장을 설립할때, 신청과 인.허가를 위해 거치는 단계는
58단계라고 한다.

미국의 9단계에 비해 무려 6배가 넘는다.

일수로 환산하면 미국의 평균 소요기간은 1백75일이고 우리나라는
9백25일이라 한다.

이웃 대만은 20단계에 2백45일이 소요된다.

구비서류의 분량을 보면 미국은 23쪽이고 우리는 이의 약 15배인
3백36쪽으로 되어 있다.

이 단적인 예에서 드러나듯이 과연 우리나라는 규제의 왕국이다.

지금 우리의 정책관료들은 중천(중천)에서 작열하고 있는 이 규제의 해가
지도록 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규제일몰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규제철폐에 대한 수사학도 크게 바뀌고 있다.

규제완화란 미지근한 용어는 "규제혁파"란 화끈한 용어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

제비가 날면 봄이 온다는데 이렇게 "말"들이 난무하고 있으니 규제는
과연 혁파될 것인가?

이 지구상의 경제체제안에서 전면적인 규제가 지배하는 곳은 물론
명령경제(command economy)로서의 공산주의이다.

공산주의가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고 자유시장경제가 승자(승자)가
되었지만, 그러나 시장경제를 택하고 있는 모든 나라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규제는 엄연히 살아있다.

시장경제의 국가들이 국가의 중재와 계획을 현실적으로 수용하는
혼합경제체제를 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규제가 전혀 없는 완전한 자유방임경제는 고전 경제학자들이 그린
시장경제의 이상향(이상향)이라고 보아야 한다.

살제에 있어서 100%의 자유방임경제가 자원의 최적배분(파레토 최적)을
그르칠 수도 있다.

우리는 독점이나 공해와 같은 방임상태의 시장에서 나타나는 이른바
"시장의 실패"를 알고 있다.

이 시장의 실패가 정부의 중재와 규제를 정당화 한다.

경제학자 스티글러는 규제가 갖는 역리를 이렇게 비꼰 적이 있다.

"기업들은 규제를 즐길 수도 있다.

규제가 그들을 치열한 경쟁으로부터 보호해 줄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기업들은 더 많은 규제를 위해 로비한다"이 이론의 핵심은 규제받는
자들이 오히려 규제하는 자들을 "포획"해서 역이용함으로써 특혜(지대)를
얻어낸다는 것이다.

시장의 실패를 보완해주기 위해서 등장한 규제가 다시 "규제의 실패"를
만들어 낸다는 이론이다.

시장이 실패할수 있듯이 정부도 실패할수 있다.

미제스 하이에크 프리드만 같은 경제학의 대가들이 평생을 받쳐 추구한
시장경제가 갖는 자유의 미덕에 대해서 오늘늘 주류경제학자들은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그러면 현실적인 경제의 운용에 있어서 어떻게 하면 시장경제의
"필요악"인 규제를 최소화하고 자유를 최대화 할수 있나?

크게 볼때 방법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규제를 하는 자들이 스스로 규제를 줄여나가는 것이다.

한국의 관료들은 지금 이 방식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권력의 속성을 아는 사람은 칼자루를 쥔사람의 "선처"에 맡기는
이 방법이 얼마나 지난한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사업가들이 수익의 극대화를 추구한다면, 관료들이란 권한의 극대화를
추구하고 있지 않은가? 하이에크가 "노예에의 길(The Road to Serfdom)"
에서의 정치력의 경제개입이 전체주의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했을때
케인즈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단긴 편지를 띄운 적이 있다.

"정책수행자들이 도덕적 문제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품을 경우,정부의
중재와 계획은 안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케인즈의 이 말에서 그 전반부의 가정은 얼마만한 현실성을
갖고 있을까?

또 하나의 방법은 모든 자유가 쟁취된 것이 듯이 "기업시민"이 경제적
자유를 얻어내기 위해 "기업시민 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지금 이런 시민운동의 움직임이 조용히 일고 있다.

4월10일 전경련산하의 "자유기업센터"가 시민운동의 개막을 알리는
현판식을 가진 것이라든지, 4월15일에 일군의 지식인과 기업가들이
세종문화회관에서 "경제자유찾기 모임"의 발기인 대회를 개최하는 것 등이
경제자유를 찾으려는 기업시민운동을 알리는 전령이다.

인류역사의 새로은 한 페이지는 언제나 자유찾기운동과 그 결실로써
장식된 것을 볼때, 시민의 경제자유찾기운동도 이제 하나의 신기원을 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자유찾기운동에도 하나의 단서를 달아야 한다.

모든 자유는 그 한계를 갖는다는 단서이다.

자유란 언제나 도덕적 엄정이란 틀안에서 있어야 한다.

자유시장경제의 원조인 아담스미스는 경제학자이기 이전에 도덕철학자였다.

그가 경제의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의 이기심을, 양심을 이미하는 "공평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와 양립시킨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A.마샬이 경제기사도(impartial chivalry)를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위에
있다.

자유는 언제나 윤리안의 자유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