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소에서 의사당 안으로 장소를 옮긴 국회특위의 한보사건 청문회는
일정상으론 절정에 접근하며 결실을 가시화해가는 그런 시점이다.

하지만 TV중계를 지켜본 국민들에겐 청문회란 없느니만 못하다는 좌절감,
정치가 송두리째 파멸하는 악몽, 어쩌면 될대로 되라는 냉소주의가 마구
뒤엉키고 있다.

당초 우려 이상으로 청문회자체가 궤도를 이탈했음은 물론이다.

정태수부자를 포함한 증인들의 부정직성을 탓하는 것은 차라리 사치가
됐다.

국민대표라는 본분을 망각한 여-야 위원들의 신문태도는 5공청문회 이후
9년세월의 답보를 정말 절망하게 만든다.

덮친 결정타야말로 정태수 리스트에 오른 신-구 정치인들의 한결같은
행태다.

중진을 포함, 내로라 하는 여-야 정치인들이 마치 예행연습이라도 한듯
"사실무근"이란 극구부인으로 시작, 검찰조사후 혐의시인이란 판에 박은
위선을 예외없이 연출하는 현장은 국민들로 하여금 분노를 넘어서 환멸을
씹게 만들었다.

그 허탈감은 이나라 정치가 잘못돼도 보통 잘못된게 아니라 뿌리째
썩었다는 국민 하나하나의 낙담으로 이어진다.

한마디로 이 정도까지 부패가 만연한 마당에 과연 누가 신문을 하고
누가 증인석에 서는가,새삼 의아해하지 않을수 없다.

중요한 것은 있을수 있는 블랙리스트의 조작적 활용을 경계하는 뜻에서도
철저한 현실파악, 원인규명, 장단기적 대비책 수립이 관철되도록 전국민이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는 일이다.

중간에 염증을 내는 것은 악에 대한 양보다.

첫째 상황적 특징은 철저한 불신이다.

정태수 증인이 국회를 내놓고 경시할만큼 돈받은 사람이 누군가를 밝히기
보다 오히려 돈을 줘도 받지 않은 사람을 꼽는 편이 효과적일 정도로 정계가
몽땅 썩었다는 개연성의 지배이며, 뿌리깊은 정치불신이다.

둘째 그같은 개연성은 한보-정태수라는 특수성을 일반화시키는
가능성이다.

이는 정치란 바로 돈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킴으로써 정치-선거 풍토에
돈의 수요를 최소화하는 당위를 이 기회에 고조시키고 실현하지 않으면
안된다.

셋째 돈안드는 정치를 위한 통합선거법의 계속 세련화등 지속적인
제도접근이 중요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유권자가 선거철마다 계속 손을 벌리는 토양이
존속하는 한 돈안드는 선거,깨끗한 정치는 공염불임을 사회가 인정해야
한다.

청문회는 오는 25일 김현철(김현철)씨 증언을 피크로 남겨놓고 있고
일정도, 증인도, 참고인도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의외의 반전이 없는 한 국민을 납득시킬 성과를 기대하긴
어려우리라는 인식이 넓어간다.

역시 불신 탓이다.

만일 90%가 상식정도로 몸체의 실재를 믿는다면 몇몇 깃털이 나서서
몸체임을 강변한들 무슨 설득력이 있을 것인가.

그런 상식이 허구임을 입증해 보이는 힘은 오로지 진실만이 지닌
위력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