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4년초 당시 포철의 박태준회장은 외국에서온 귀빈을 모시고 헬기로
김포에서 포항으로 향했다.

포항상공에 이르렀을 때다.

박회장은 제철소의 위용을 자랑하기 위해 창아래로 눈길을 돌렸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조금전까지 말끔하던 하늘이 잔뜩 흐려있지 않은가.

자랑을 포기한 박회장은다시 아래를 자세히 살펴봤다.

구름이 낀게 아니었다.

매연과 먼지 때문에 시야가 흐려진 탓이었다.

손님접대를 끝낸 뒤 박회장은 설비부장을 불러 강력히지시했다.

"포항하늘의 매연과 먼지를 없애도록 하시오"

찌푸린 날씨를 당장 "맑음"으로 바꾸라고 엄명했다.

잔뜩 긴장한 설비부장은 긴급히 10개 입찰등록업체 사장들을 불러모았다.

그러나 등록업체 사장들은 한결같이 국내엔 대형공장의 분진을 집진할
기술을 가진 업체가 없다고 얘기했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설비부장은 우연히 경제신문을 들추다 성장기업면에서 집진기
전문업체기사를 발견했다.

이 회사의 이름은 공영엔지니어링.

설비부장은 즉시 공영의 전화번호를 알아내 포철에 한번 방문해줄 것을
요청했다.

연락을 받은 정봉규 공영엔지니어링사장(50)은 귀가 번쩍 띄였다.

이제 살았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사장은 곧장 포철로 달려갈 틈이 도저히 없었다.

그는 76년에 창업해 8년간 오직 집진기 기술개발에 20억을 투자하는
바람에 패가망신 상태였다.

7억원이란 사채빚에 쫓기는데다 음력설까지 겹쳐 1주일뒤에야 겨우
포철을 찾아갈 수 있었다.

수위실에서 설비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응답은 간단했다.

"그냥 돌아가십시오"

이미 외국기업에 발주키로 결정이 났다는 거였다.

정사장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참담했다.

여기서 수주를 받지 못하면 영영 사업은 끝장 날 판국이었다.

그동안 수십억원을 들여 집진기를 개발했지만기술이 너무 앞서 수요자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용기를 냈다.

설비부장에게 단몇분간만 차한잔 마실 시간을 좀 빌리자고 간청했다.

설비부장은 마지못해 응했다.

그러나 차한잔을 마시기로 한 면담이 여섯시간이나 이어졌다.

정사장은 이 여섯시간에 20억원의 투자비와 기업인생명을 걸었다.

기술내용을 살펴본 포철측 기술자들은 실색했다.

이런 기술이 어디서 났느냐는 거였다.

왜 이제서야 나타났느냐고 나무라기까지 했다.

포철측은 그동안의 자체조사자료를 그자리에서 폐기했다.

정사장에게 일단 3억5천만원을 주며 포항의 병든 하늘을 고치는
조사작업에 착수해달라고 부탁했다.

곧 8억2천9백만원짜리 석회소성공장 집진기설비공사를 맡겼다.

첫공사였지만 오차없이 완벽했다.

이어 20억짜리 15억짜리 40억짜리등 제철소내 집진기설치 주문이
잇달았다.

현재의 김만제회장은 전보다 환경친화부문투자를 더 늘렸다.

덕분에 공영은 지난1월초 주선기공장에 28억짜리를 설치한 것까지 합해
지난 12년간 모두 45개의 대형집진플랜트를 포철에 설치했다.

이제 포항의 하늘은 맑다.

헬기에서 내려다봐도 제철소전경이 훤히 들어온다.

한 중소기업인의 지독한 열정이 드디어 하늘까지 고쳐놨다.

< 중소기업 전문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