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열전] (16) 절재 김종서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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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29년 5월 26일 세종은 김종서 등 의정부 대신들과 승문원 제조
정인지 등을 불러서 왜인들이 진도 서남쪽 고초도(지금의 거차도)에 와서
고기잡이를 하며 세금을 내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의견을 묻는다.
"당초 고초도에서 왜인들이 물고기 잡는 것을 허가함에 논의가 여러
갈래였었으나 마침내 왜인에게 허가하는 것으로 정했었다.
세금을 바치기로 약속한 것은 국용에 이바지하려고 해서가 아니다.
대마 한 섬이 옛 문적에는 우리나라 말 기르던 땅으로 실려 있고 왜인들
역시 본래는 우리나라 섬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섬은 마침내 왜적의 소굴이 되었다.
이제 고초도를 완전히 허가하고 돌아보지 않는다면 뒷날 대마도와 같이
될는지 어찌 알겠는가.
그러므로 이미 물고기 낚는 것을 허가하여 은혜 베푸는 뜻을 보이고 또
세금을 납부하게 하여 그로써 우리나라 땅임을 밝히려 하였다.
그러나 물고기 낚는 것을 허락한 이래 약속어긴 자들을 수색하려 한지가
10여년인데 지금까지 하지 못하였다.
또 근래에 조휘를 대마도에 보내어 약속을 어기고 물고기를 낚는 자는
군대를 보내어 수색 체포하기로 다시 약속을 굳게 하였으니 이제 또 수색
체포하지 않으면 왜인들은 또한 이르기를 조선이 수색체포하겠다고 소리쳐
말하나 실제 일찍이 한 번도 보낸 일이 없다 하고 마음대로 몰래 점거
함으로써 변방의 우환이 될 것이니 군대를 보내어 수색 체포해야겠는데 그
어느 때로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근자에 지세포에 납세하는 자가 심히 많고 내지 않는 자는 5~6인
이라 하는데 종정성은 곧 세금을 징수하여 보내려 한다 하고 조휘가 약속한
말을 성심으로 순종하여 잠시도 틈나지 않게 한다 하니 만약 군사를 보내어
수색 체포하게 한다면 변경에 사단이 일어날 터이라 또한 할 수가 없다.
이제 잠시 그것을 정지하고 사람을 보내어 정지하는 뜻으로 타이르게 하면
어떠할까.
또 수색 토벌하는 시기를 매해 4월로 정하면 저들도 또한 알고 미리 피하여
범하지 않아 변방의 사단이 없을 터이니 거의 양쪽 다 안전할 듯하다"
이에 하연은 대마도주 종정성이 지성 귀순하고 있으니 고초도를 수색하여
체포할 수는 없으며 약속을 어긴 자들에게는 사람을 보내어 그 이유를 묻고
형세를 보아가며 대처하자는 소극적인 의견을 제시한다.
그러나 김종서는 황보인 정인지와 함께 다음과 같이 적극적인 의견을 피력
한다.
"이제 이미 다시 약속을 정하였으니 수색 체포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전라도 백성들은 그 물고기 낚는 자들이 마음대로 왕래하면 반드시 도적질
하는 재앙이 있으리라 근심합니다.
지금 군대를 보내어 수색 체포하지 않으면 왜적의 변이 있을지 모릅니다.
금년은 7월이 이미 가까웠으니 배를 띄울 수 없지만 명년 3~4월에는 반드시
군대를 보내어 수색 체포해야 합니다.
꼭 3~4월로 정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서울로부터 이문(한 관청에서 다른 관청으로 보내는 공문)을 보내어 배를
띄울 때면 저들도 미리 알고 피할 것입니다.
금년에 수색 체포하지 않는다는 뜻도 반드시 통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종은 김종서 등의 의견을 좇기로 하고 도승지에게 이 사실을 잘 기록해
두었다가 명년 1월에 다시 아뢰라고 이른다.
그리고 6월 11일에는 의정부와 육조에 인사 개편이 단행되는데 신개가
돌아간 다음 오랫동안 궐석으로 비어 있던 좌의정 자리에 우의정 하연을
승진 발령하고 우의정에는 좌찬성 황보인을 승진시키며 좌찬성 자리는
이조판서 박종우가 발탁되었고 이조판서 자리에는 예조판서 정인지가 옮겨
앉으며 예조판서에는 명재상으로 소문나 있던 고 좌의정 허조(1369~1439)의
자제인 예조참판 허후(?~1453)가 승차되었다.
세종 측근의 중신들이 모두 요직으로 승진 발령되었는데 김종서만 우찬성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된 것이다.
세종은 김종서를 지극히 아끼고 믿었기 때문에 어느 벼슬에 앉히거나
오래 그 자리를 지키게 하여 소신껏 그 뜻을 펼치게 하였으니 함길도
병마도절제사 자리에서 8년을 지내었고 예조판서로 6년을 지낸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니 의정부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우찬성 자리에 올려 놓은 다음 이
자리도 구임시킬 생각을 하였던 모양이다.
정승으로 승진하면 책임이 무거워져 직언과 직설이 어렵게 되므로 김종서
의 대쪽같은 성품을 잘 아는 세종은 일부러 김종서의 승진을 억제시키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군과 현신의 무언의 교감을 세속의 안목으로야 어찌
촌탁할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후배로서 좌찬성 자리에 미리 오른 박종우는 무안한 나머지 김종서
가 자신을 미워하리라 생각하여 과거에 자신을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로 천거
했었던 김종서를 경계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끝내 수양대군에게 빌붙어 김종서를 제거하는데 한
몫을 하고 김종서 살해 후 그를 깎아내리는 일을 하면서 이때 김종서가
좌찬성이 되지 못한 것을 몹시 분하게 생각하였다고 기록해 남긴다.
세종이 김종서에게 분한 마음을 갖도록 인사관리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김종서 같은 충의지사가 벼슬의 오르내림에 분심을 내는 못난 짓을
하였을리도 만무하다.
이때 김종서는 군마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말과 수레를 관장
하는 사복시의 제조를 겸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6월 26일에 왕세자는 "사복제조 김종서에게 들으니 "원숭이가 있는
곳에서는 말이 병들지 않는다"고 하는데 원숭이가 있는 내승에서는 말이
병들지 않고 원숭이가 없는 외승에서는 말이 자주 죽는 것을 보니 그 말을
증험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김종서는 7월 27일 장문의 상소를 올려 군비 증강의 필요성을 역설
하는데 그 내용을 갖추려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가 정치와 교화는 모두 잘 이행되어 더 말할 것이 없지만 군사에
관한 한가지 일만은 문제가 있다.
병가에서 이르기를 "백성을 가르치지 않고 싸우면 이는 무리를 적에게 주는
것"이라 하였고 유가에서도 역시 말하기를 "병사는 많은데 있지 않고
정예한데 있다"
하였거늘 우리 군사현황을 보면 무기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고 군사들의
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땅이 넓고 사람이 많은 삼남지방은 응당 군마와 군병이 충분하여 정예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갑주는 견고하지 못하고 군마는 부족하며
각궁을 대개 갖지 못하고 열에 여덟 아홉은 목궁을 가지고 있으며 그나마
군사들은 훈련이 전혀 안되어 앉고 일어서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법을 아는
자가 드물다.
하물며 흉년이 계속되는 황해도와 평안도에서야 굶어 죽는 것을 면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어느 사이에 군비를 갖출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평안도는 변방을 지키는 정역의 노고와 사신을 호송하는 번거로움
까지 보태지고 있다.
그래서 비록 국경의 강변에 보루를 세워 겨우 방비는 하고 있으나 안에서
응원해줄 굳은 장비가 없으니 좀도적이라면 가히 방비할 수 있겠지만 큰
도적일 경우엔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이것을 생각하면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요나라 사람이 이르기를 여진인이 만명에 이르면 천하에 대적할 이가 없다
하였는데 과연 요나라가 만명이 차고 남은 여진에게 패망하였고, 고려
때에는 사적이 망한 원나라의 남은 병졸들로 서쪽을 침범할 때 변방에서
이를 막지 못하자 무인지경에 들어오듯 밀고 들어왔으니 이것을 거울삼아야
한다.
국가가 안으로 훈련기관을 설치하고 밖으로 단련기관을 두는 것은 모두
이런 뜻밖의 일에 대비하려는 것인데 이제 흉년을 핑계대거나 백성의
괴로움을 덜어준다는 구실로 무기와 갑주를 수선하지 않고 활쏘고 말타기를
익히지 않으며 진법을 도외시하면 백성들이 군대일을 모르게 될 터이니 작은
일이 아니다.
중국의 금위군사들은 날마다 진법을 익히고 제로 진장들은 밥먹을 틈도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서북으로 산오랑캐와 이어지고 동남으로 섬오랑캐와 가까워
사방으로 외적을 받게 되었는데 어찌 하루인들 방비를 잊을 수 있겠는가.
의논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훈련을 시키려 하면 백성이 굶주려 할 수 없다고
하고, 갑옷과 병장기를 수리하려 하면 백성이 가난하여 지탱할 수 없다고
하며, 점검하려 하면 백성이 시끄럽게 동요한다고 하고, 군사를 움직이려
하면 창고가 비어 있다 하는데 외환이 우리 백성이 굶주린다 하여 생기지
않겠으며 외구가 우리 창고가 비어 있다 하여 오지 않겠는가.
8월부터 서울 군사는 번드는 날을 제외하고 매일 진법을 익혀 앉고 서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절도를 익히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며 말을
달리면서 치고 찌르는 방법을 익숙하게 해야 한다.
각도의 대소 진장들도 항상 당번 군졸들을 거느리고 이와같이 교습시켜야
하며 추수가 끝나면 각도 감사는 각 고을을 순행하며 각색 군정과 군장,
마필을 점검하고 연속 조련하게 해야 한다.
하루라도 훈련을 중단해서는 안된다"
이런 내용의 장문의 상소가 올라오자 세종은 곧 세자에게 명하여 좌의정
하연, 좌찬성 박종우, 우찬성 김종서, 좌참찬 정분, 우참찬 정갑손, 도승지
황수신을 불러서 이를 보게 하고 이렇게 전지를 내린다.
"김종서가 말한 바 사졸을 훈련하고 기계를 단련하는 등의 일은 심히 내
마음에 합당하다.
그러나 국가가 거사하려 함에 혹시 그것을 막는 자도 있을 터이고 또 힘이
부족하여 마침내 이루어내지 못하는 것도 있을 터이니 경들은 마땅히 좋은
계책을 개진하도록 하라"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8일자).
정인지 등을 불러서 왜인들이 진도 서남쪽 고초도(지금의 거차도)에 와서
고기잡이를 하며 세금을 내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의견을 묻는다.
"당초 고초도에서 왜인들이 물고기 잡는 것을 허가함에 논의가 여러
갈래였었으나 마침내 왜인에게 허가하는 것으로 정했었다.
세금을 바치기로 약속한 것은 국용에 이바지하려고 해서가 아니다.
대마 한 섬이 옛 문적에는 우리나라 말 기르던 땅으로 실려 있고 왜인들
역시 본래는 우리나라 섬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섬은 마침내 왜적의 소굴이 되었다.
이제 고초도를 완전히 허가하고 돌아보지 않는다면 뒷날 대마도와 같이
될는지 어찌 알겠는가.
그러므로 이미 물고기 낚는 것을 허가하여 은혜 베푸는 뜻을 보이고 또
세금을 납부하게 하여 그로써 우리나라 땅임을 밝히려 하였다.
그러나 물고기 낚는 것을 허락한 이래 약속어긴 자들을 수색하려 한지가
10여년인데 지금까지 하지 못하였다.
또 근래에 조휘를 대마도에 보내어 약속을 어기고 물고기를 낚는 자는
군대를 보내어 수색 체포하기로 다시 약속을 굳게 하였으니 이제 또 수색
체포하지 않으면 왜인들은 또한 이르기를 조선이 수색체포하겠다고 소리쳐
말하나 실제 일찍이 한 번도 보낸 일이 없다 하고 마음대로 몰래 점거
함으로써 변방의 우환이 될 것이니 군대를 보내어 수색 체포해야겠는데 그
어느 때로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근자에 지세포에 납세하는 자가 심히 많고 내지 않는 자는 5~6인
이라 하는데 종정성은 곧 세금을 징수하여 보내려 한다 하고 조휘가 약속한
말을 성심으로 순종하여 잠시도 틈나지 않게 한다 하니 만약 군사를 보내어
수색 체포하게 한다면 변경에 사단이 일어날 터이라 또한 할 수가 없다.
이제 잠시 그것을 정지하고 사람을 보내어 정지하는 뜻으로 타이르게 하면
어떠할까.
또 수색 토벌하는 시기를 매해 4월로 정하면 저들도 또한 알고 미리 피하여
범하지 않아 변방의 사단이 없을 터이니 거의 양쪽 다 안전할 듯하다"
이에 하연은 대마도주 종정성이 지성 귀순하고 있으니 고초도를 수색하여
체포할 수는 없으며 약속을 어긴 자들에게는 사람을 보내어 그 이유를 묻고
형세를 보아가며 대처하자는 소극적인 의견을 제시한다.
그러나 김종서는 황보인 정인지와 함께 다음과 같이 적극적인 의견을 피력
한다.
"이제 이미 다시 약속을 정하였으니 수색 체포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전라도 백성들은 그 물고기 낚는 자들이 마음대로 왕래하면 반드시 도적질
하는 재앙이 있으리라 근심합니다.
지금 군대를 보내어 수색 체포하지 않으면 왜적의 변이 있을지 모릅니다.
금년은 7월이 이미 가까웠으니 배를 띄울 수 없지만 명년 3~4월에는 반드시
군대를 보내어 수색 체포해야 합니다.
꼭 3~4월로 정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서울로부터 이문(한 관청에서 다른 관청으로 보내는 공문)을 보내어 배를
띄울 때면 저들도 미리 알고 피할 것입니다.
금년에 수색 체포하지 않는다는 뜻도 반드시 통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종은 김종서 등의 의견을 좇기로 하고 도승지에게 이 사실을 잘 기록해
두었다가 명년 1월에 다시 아뢰라고 이른다.
그리고 6월 11일에는 의정부와 육조에 인사 개편이 단행되는데 신개가
돌아간 다음 오랫동안 궐석으로 비어 있던 좌의정 자리에 우의정 하연을
승진 발령하고 우의정에는 좌찬성 황보인을 승진시키며 좌찬성 자리는
이조판서 박종우가 발탁되었고 이조판서 자리에는 예조판서 정인지가 옮겨
앉으며 예조판서에는 명재상으로 소문나 있던 고 좌의정 허조(1369~1439)의
자제인 예조참판 허후(?~1453)가 승차되었다.
세종 측근의 중신들이 모두 요직으로 승진 발령되었는데 김종서만 우찬성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된 것이다.
세종은 김종서를 지극히 아끼고 믿었기 때문에 어느 벼슬에 앉히거나
오래 그 자리를 지키게 하여 소신껏 그 뜻을 펼치게 하였으니 함길도
병마도절제사 자리에서 8년을 지내었고 예조판서로 6년을 지낸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니 의정부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우찬성 자리에 올려 놓은 다음 이
자리도 구임시킬 생각을 하였던 모양이다.
정승으로 승진하면 책임이 무거워져 직언과 직설이 어렵게 되므로 김종서
의 대쪽같은 성품을 잘 아는 세종은 일부러 김종서의 승진을 억제시키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군과 현신의 무언의 교감을 세속의 안목으로야 어찌
촌탁할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후배로서 좌찬성 자리에 미리 오른 박종우는 무안한 나머지 김종서
가 자신을 미워하리라 생각하여 과거에 자신을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로 천거
했었던 김종서를 경계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끝내 수양대군에게 빌붙어 김종서를 제거하는데 한
몫을 하고 김종서 살해 후 그를 깎아내리는 일을 하면서 이때 김종서가
좌찬성이 되지 못한 것을 몹시 분하게 생각하였다고 기록해 남긴다.
세종이 김종서에게 분한 마음을 갖도록 인사관리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김종서 같은 충의지사가 벼슬의 오르내림에 분심을 내는 못난 짓을
하였을리도 만무하다.
이때 김종서는 군마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말과 수레를 관장
하는 사복시의 제조를 겸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6월 26일에 왕세자는 "사복제조 김종서에게 들으니 "원숭이가 있는
곳에서는 말이 병들지 않는다"고 하는데 원숭이가 있는 내승에서는 말이
병들지 않고 원숭이가 없는 외승에서는 말이 자주 죽는 것을 보니 그 말을
증험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김종서는 7월 27일 장문의 상소를 올려 군비 증강의 필요성을 역설
하는데 그 내용을 갖추려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가 정치와 교화는 모두 잘 이행되어 더 말할 것이 없지만 군사에
관한 한가지 일만은 문제가 있다.
병가에서 이르기를 "백성을 가르치지 않고 싸우면 이는 무리를 적에게 주는
것"이라 하였고 유가에서도 역시 말하기를 "병사는 많은데 있지 않고
정예한데 있다"
하였거늘 우리 군사현황을 보면 무기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고 군사들의
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땅이 넓고 사람이 많은 삼남지방은 응당 군마와 군병이 충분하여 정예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갑주는 견고하지 못하고 군마는 부족하며
각궁을 대개 갖지 못하고 열에 여덟 아홉은 목궁을 가지고 있으며 그나마
군사들은 훈련이 전혀 안되어 앉고 일어서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법을 아는
자가 드물다.
하물며 흉년이 계속되는 황해도와 평안도에서야 굶어 죽는 것을 면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어느 사이에 군비를 갖출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평안도는 변방을 지키는 정역의 노고와 사신을 호송하는 번거로움
까지 보태지고 있다.
그래서 비록 국경의 강변에 보루를 세워 겨우 방비는 하고 있으나 안에서
응원해줄 굳은 장비가 없으니 좀도적이라면 가히 방비할 수 있겠지만 큰
도적일 경우엔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이것을 생각하면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요나라 사람이 이르기를 여진인이 만명에 이르면 천하에 대적할 이가 없다
하였는데 과연 요나라가 만명이 차고 남은 여진에게 패망하였고, 고려
때에는 사적이 망한 원나라의 남은 병졸들로 서쪽을 침범할 때 변방에서
이를 막지 못하자 무인지경에 들어오듯 밀고 들어왔으니 이것을 거울삼아야
한다.
국가가 안으로 훈련기관을 설치하고 밖으로 단련기관을 두는 것은 모두
이런 뜻밖의 일에 대비하려는 것인데 이제 흉년을 핑계대거나 백성의
괴로움을 덜어준다는 구실로 무기와 갑주를 수선하지 않고 활쏘고 말타기를
익히지 않으며 진법을 도외시하면 백성들이 군대일을 모르게 될 터이니 작은
일이 아니다.
중국의 금위군사들은 날마다 진법을 익히고 제로 진장들은 밥먹을 틈도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서북으로 산오랑캐와 이어지고 동남으로 섬오랑캐와 가까워
사방으로 외적을 받게 되었는데 어찌 하루인들 방비를 잊을 수 있겠는가.
의논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훈련을 시키려 하면 백성이 굶주려 할 수 없다고
하고, 갑옷과 병장기를 수리하려 하면 백성이 가난하여 지탱할 수 없다고
하며, 점검하려 하면 백성이 시끄럽게 동요한다고 하고, 군사를 움직이려
하면 창고가 비어 있다 하는데 외환이 우리 백성이 굶주린다 하여 생기지
않겠으며 외구가 우리 창고가 비어 있다 하여 오지 않겠는가.
8월부터 서울 군사는 번드는 날을 제외하고 매일 진법을 익혀 앉고 서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절도를 익히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며 말을
달리면서 치고 찌르는 방법을 익숙하게 해야 한다.
각도의 대소 진장들도 항상 당번 군졸들을 거느리고 이와같이 교습시켜야
하며 추수가 끝나면 각도 감사는 각 고을을 순행하며 각색 군정과 군장,
마필을 점검하고 연속 조련하게 해야 한다.
하루라도 훈련을 중단해서는 안된다"
이런 내용의 장문의 상소가 올라오자 세종은 곧 세자에게 명하여 좌의정
하연, 좌찬성 박종우, 우찬성 김종서, 좌참찬 정분, 우참찬 정갑손, 도승지
황수신을 불러서 이를 보게 하고 이렇게 전지를 내린다.
"김종서가 말한 바 사졸을 훈련하고 기계를 단련하는 등의 일은 심히 내
마음에 합당하다.
그러나 국가가 거사하려 함에 혹시 그것을 막는 자도 있을 터이고 또 힘이
부족하여 마침내 이루어내지 못하는 것도 있을 터이니 경들은 마땅히 좋은
계책을 개진하도록 하라"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