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배 사장은 그녀가 교포라는 말에 얼른 햄버거를 시킨다.

스위트룸은 굉장히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마누라가 응접실 겸해서 꾸며놓고 죽었는데 박동배는 지금 그 황실같이
꾸며놓은 스위트룸에 힐러리같이 깨끗하고 기품있게 생긴 제인을 모셨다.

"소파에 편히 앉아요. 이군이 아가씨가 시장할 것 같다고 해서 햄버거를
시켰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그는 은근한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CD를 걸어놓으며, "무슨 음악을
사랑하지요? 주스를 마실래요? 아니면 우유?"

제법 시적으로 말한다.

야, 마음에 드는 노신사로구나.

제인은 혼미한 속에서도 그에게 감사를 한다.

아무튼 그녀는 지금 밖으로 걸어 나갈 힘도 의욕도 없는 황당한
컨디션이다.

언젠가 빌리와 헤어지기 얼마전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극도로 피로한 속에 코카인을 하고 동침을 한뒤 음식을 먹으러 밖으로
나오다가 층계에서 기절을 했는데, 깨어나고 보니 자기들의 자취방이었다.

그녀는 빌리가 아주 쓰러져 앰뷸런스로 실려가 죽기전에 지금과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혼돈속에 일어서지도 앉지도 누울 수도 없는 이상한
무기력이 그녀를 강타했었다.

그때보다는 조금 나은 상태지만 그녀는 지금 누구의 도움이라도 빌리지
않고는 이 무력감을 이겨낼 수 없는 불가항력의 초벌죽음 속에 있다.

구름속에 앉아 있는 것도 같고 지옥으로 가는 길목에서 헤매는 것도
같은 환상과 환청이 그녀를 괴롭힌다.

지금 그녀는 자기가 죽고 있는 건지 살아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식은땀을 비오듯 흘리면서 소파에 길게 기대앉아 있다.

박동배는 그녀의 가냘픈 손을 만지면서 속으로 아이구 죽여주는
손이구나, 이쁜것, 내가 원하고 있는 청초한 타입의 이 아가씨는 정말
나의 혼을 모두 빼앗아갈만한 미인이구먼. 나는 그대를 정말 사랑할것
같다.

나의 아기. 그는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아서 소파에 곱게 눕힌다.

"정신이 들때까지 그대로 누워 있어요"

이때 이군이 햄버거를 사들고 나타난다.

"밤이 늦어서 하마터면 못살 뻔 했습니다"

"수고했어. 정신이 나면 내 차로 모셔다줄거야"

그래도 이군은 무엇이 궁금한지 방에서 나갈 염을 않는다.

"아가씨, 이 햄버거 좀 들어요. 배가 고프면 현기증이 나요"

웨이터는 종이를 벗겨서 햄버거를 제인의 코 앞에 내민다.

겨우 눈을 뜬 제인은 미소하며 "고마워요"한다.

"이군은 내려가봐. 아가씨는 내가 돌봐줄게"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