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번에 갈라진 조국의 북을 떠나 남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나의 청원을 허락하여 주고 한국으로 들어올수 있도록 따뜻이 맞이하여
준데 대하여 대한민국 정부에 충심으로부터 감사를 드린다.

또한 나의 문제를 국제관례에 따라 처리해준 중국과 비율빈(필리핀)정부
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우리 민족은 벌써 반세기 이상이나 분열의 고통을 겪고 있다.

나의 삶의 터전이었던 북조선은 이미 희망을 잃은지 오래 되었다.

올바른 생각을 가진 자는 그것을 표현할 길이 없으며 오히려 견제와 감시
속에서 제대로 숨조차 쉴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북조선은 사회주의와 현대판 봉건주의, 군국주의가 뒤섞인 기형적 체제로
변질되었으며 경제는 전반적으로 마비상태에 들어가고 있다.

인민들은 기아에 신음하고 있으며 북조선 당국은 국제사회에 구원의 손을
내밀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사회주의 지상락원을 건설하여 놓았다고 호언장담하던 나라가 빌어먹는
나라로 전락되었다.

오늘 남북간의 대립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간 대립이 아니라 봉건독재와
자유민주주의의 대립이며 봉건적 군국주의와 자본주의적 경제주의의 대립
이며 전쟁과 평화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북조선 당국은 남북간의 대립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대립으로 규정하고
남한을 계급적 원수로 간주하면서 남조선해방의 기치밑에 무력통일 방침을
정당화 하려고 모든 힘을 다하고 있다.

북조선 당국이 인민들을 굶어죽는 상태에서 두고서도 개혁개방을 기어코
거부하고 전쟁준비에 계속 몰두하고 있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은
명백하다.

이제 북조선은 수십년동안 전력을 다하여 키운 막강한 무력을 사용하는
길밖에 없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수십년간 신임 받으며 지내온 북조선 당국의 고위간부로서, 내외에 많은
벗을 가지고 있는 학자로서, 사랑하는 가족과 많은 친우를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 생각은 끝없이 복잡하고 고민은 비길데 없이 심각하였다.

그러나 모든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다 합쳐도 7천만 우리 민족의 생사운명
과 바꿀수 없다는 양심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다.

출로는 오직 남쪽 형제들과 손잡고 전쟁을 막아보는 길밖에 없다고 확신
하게 되어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나는 이미 민족앞에 큰 죄를 지었으며 부끄럽기 그지없다.

이죄는 그 무엇으로써도 보상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며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나마 조금이라도 죄를 씻고 죽을수 있겠는지 그것이 걱정이다.

그러나 남쪽동포들이 허락만 해준다면 힘을 합쳐 전쟁도발을 막고 우리
민족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마지막 힘을 바침으로써 조금이나마 민족앞에
속죄할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처음으로 유서 깊은 력사의 도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보는 심정은
감개무량하며 그동안 민족의 영예를 떨치기 위하여 많은 일을 하여온 남쪽
형제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감사합니다.

황장엽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