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 머물던 황장엽 북한노동당비서가 20일 한국에 입국함으로써
황비서가 지난 2월12일 북경주재 한국영사부에 망명을 요청한지 67일만에
이 사건이 최종 마무리됐다.

황비서가 한달여의 필리핀 체류를 청산하고 국내에 입국한 만큼 이제
관심은 황비서의 망명이 가져올 정국파장과 남북관계 변화에 모아지고 있다.

특히 김현철씨 국정개입의혹과 한보사건의 수렁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여권이 "황장엽 리스트" 등을 활용, 국면전환을 꾀할 경우 정치권에
엄청난 파장은 물론 남북관계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점에서 황의
"입"에 국민적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현재로선 여권이 황비서의 입국을 정국돌파의 무기로 삼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우선 정부는 황비서가 북경에 머물고 있을 당시 중국과의 협상과정에서
황비서의 망명허용 조건으로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을 것과
<>북한을 자극하지 않을 것 등을 약속한 바 있다.

정부는 이에따라 황비서의 "서울직행" 방침을 철회, 제3국에서 한달이상
체류시킨뒤 데려오는 등 "냉각기"를 가졌다.

게다가 뉴욕 3자 준고위급협의에서 북한이 4자회담 참석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고 정부도 민간차원의 대북쌀지원을 허용하고 1천만달러
규모의 추가 대북지원을 할 예정이어서 남북관계가 개선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함께 기업인과 기술자들의 방북이 재개됐으며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KEDO) 실무진이 최초로 북한에 다녀오는 등 대북경수로사업도 본궤도에
들어서고 있다.

여야 정치권에서도 황비서의 입국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된다는게
대체적인 분위기다.

김종필 자민련총재가 지난 18일 기자회견에서 "황장엽을 영웅시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데 이어 신한국당도 19일 황비서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이같은 정황으로 볼때 황비서의 입국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는 점진적인
개선 분위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은 황비서 망명사건 이후 "변절자는 갈테면 가라"는 담화를 발표,
황비서의 망명을 용인하는 입장을 밝힌 뒤 남북문제에 상당히 신축적으로
임하고 있다.

북한의 유화적인 태도는 오는 7월 김정일의 권력승계를 앞두고 있는데다
심각한 식량난 타개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는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하지만 황비서 망명사건이 지닌 "뇌관"은 여전히 남아 있다.

북한당국이 식량난과 경제난,권력공백으로 인한 체제불만세력의 관심을
딴곳으로 돌리기 위해 황비서 사건을 한국의 정치적 공작으로 몰아 남북
대결국면을 조성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앞으로 황비서에 대한 관계기관의 조사과정에서 터져 나올 수 있는
김일성 김정일부자에 대한 내용 등 북한내 기밀사항과 "황장엽 리스트" 등을
정부가 세련되게 처리하지 못할 경우 남북간 긴장고조와 정국의 파문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 이건호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