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이 지난 92년 대선자금을 공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치권에 미묘한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청와대는 한보사태와 김현철씨 비리문제로 야기된 정국혼란을 정면 돌파하는
방안으로 대선자금 공개방침을 세웠으나 신한국당은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격"이라며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야권은 즉각 대선자금 전면공개를 요구하면서도 여권의 대선자금 공개방침이
현시점에서 불거져나온 배경에 대해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야권은 특히 한보파문을 조기에 잠재우고 김영삼 대통령 퇴임후의 안전판을
마련하기 위한 다목적 카드일수도 있다며 공세의 고삐를 바짝 죄고 있어
대선자금 공개문제가 한보정국이후 최대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신한국당은 청와대의 대선자금 공개방침이 25일의 김현철씨 청문회와 이어질
검찰의 소환조사, 비리연루자들에 대한 사법처리 수순으로 한보정국을 매듭
짓고 국면전환을 통해 정국주도권을 거머쥐려는 의도로 보고 있다.

당지도부는 아직 별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으나 대다수 당관계자들은
대선자금 공개를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는 상황이다.

한 당직자가 24일 "대선자금을 공개하면 나라가 무너질 것"이라고 극단적인
언급을 한 것은 그 대표적 경우다.

대선자금 공개가 정치권은 물론 경제 사회 전반에 몰고올 엄청난 파장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관계자들은 "대선자금을 공개해 불법 선거자금이 사용됐다는 사실이 확인
될 경우 자금출처를 조사해야 하고 그러다보면 웬만한 기업은 모두 걸려들게
아니냐"며 "가뜩이나 나라사정이 어려운 마당에 도대체 어쩌자는 얘기냐"고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한 당직자는 "대선자금 공개는 자연 불법선거자금에 대한 수사로 이어질 것"
이라면서 "지난 대선당시 여야에 흘러들어간 돈을 추적하면 재벌그룹을 포함,
걸려들지 않을 기업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다른 당직자도 "대선자금 공개를 주장하는 것은 자금공개가 몰고올 파장의
위력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며 "정확한 내역을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중앙당에서 조달해 쓴 부분은 집계가 나오겠지만 사조직을 비롯한 각급
지원조직에서 사용한 수치는 취합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과거 몇차례 대선
자금 공개를 검토했다가 포기한 점을 염두에 둬야한다는게 당의 대체적인
분위기다.

따라서 당관계자들은 돈이 많이 드는 과거의 잘못된 정치관행과 선거문화를
반성하고 앞으로 개선하겠다는 원론적 수준의 입장표명이라면 몰라도 총액과
구체적 내역을 밝히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 일부 초선의원들을 중심으로 대선자금을 전면 공개해
현 시국을 정면돌파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비록 정치관행이었다 하더라도 과거의 잘못을 솔직히 공개 시인하고 용서를
받아야만 정권재창출을 위한 새출발이 가능하다는게 이들의 견해다.

국민회의는 여권의 대선자금 공개입장표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국민회의 조세형 총재권한대행은 "대선자금의 내용은 당연히 밝혀져야
하지만 공개형식은 정직하고 정확하게 반성적이고 사죄적 입장이 돼야 한다"
며 "제도보완의 하나로 얼버무리려 하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
했다.

박지원 기획조정실장은 "지금 정국의 최대 이슈는 한보몸체수사와 김현철씨
의 국정개입의혹"이라며 "임기후를 대비한 호도책이 되선 안되며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민련은 이번 기회에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대통령선거의 실상을 국민
에게 알려 내각제 개헌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키는데 주력하려는 눈치다.

안택수 대변인이 이날 논평에서 "천문학적 대선자금을 잊어버리기 위해서는
대통령선거의 완전공영제나 내각제로 바꾸는 대안을 모색하라"고 촉구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다.

<김삼규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