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열전] (17) 절재 김종서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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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의 군비 증강책에 대한 세종의 절대적인 지지가 표명되면서 그
구체적인 계책을 대신 중신들에게 하문하니 좌의정 하연은 하삼도에서
인구비례에 따라 한군에서 한두명씩 군사를 선발하여 그 고을에서 의복과
양식을 준비해 주어 평안도로 보내어 윤번으로 방어를 맡게 한다면 일의
처리가 쉽고 평안도 백성들은 어깨를 쉴 수 있을 것이라고 간단하게 대답
한다.
이에 김종서는 그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아뢴다.
"신이 일찍이 함길도를 진무함에 활 쏘는 군사가 심히 많았었고 경상도를
순찰함에는 병사가 많았었으나 모두 정예하지 않았었습니다. 평안도는 비록
아직 목격하지는 못하였습니다만 그러나 변경의 장수들에게 물어서 사졸의
허약함과 병장기와 성채의 미비를 깊이 알고 있습니다. 최윤덕이 세상을
떠나면서 신에게 "평안도는 실로 외적을 받는 문과 뜰(문정)인데 국가가
지키고 방어함이 진실로 엉성하고 걱정스럽게 되어 있다. 내가 병이 심하여
아직 상서하지 못하였는데 다행히 그대와 더불어 이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이와 같이 그대로 둔다면 내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신도 역시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도적 수만이
와서 침범하는 일이 있다면 평안도의 허약한 병졸과 해진 갑옷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터이니 방비하여 막을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뒤이어 김종서와 어린 시절 공주 요당면에서 함께 자라나 김종서와 뜻을
같이 하는 좌참찬 정분이 이렇게 거들어 말한다.
"신이 평안도 감사를 하였기에 그 도의 일을 모두 아는데 근년에 기근이
계속되어 백성들이 가난하니 병장기를 새롭게 하고 타는 말을 충실하게
하려 한다면 비록 가산을 다 팔아 없앤다 해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백성들이 일찍이 말하기를 행성을 쌓으면 수자리 사는 부역이 조금
풀리려나 했더니 이제 행성을 이미 다 쌓았는데도 수자리 사는 군졸을
줄이지 않아 휴식할 기약이 없다. 성 쌓은 공이 어디 있는가 라고 했습니다.
행성을 이미 쌓은 땅으로는 좀도둑이 갑자기 들어올 수 없을 듯하니 변방
지키는 군사의 수효를 헤아려 줄이고 병장기는 사사로이 마련할 수 없으니
관가에서 저장해 둔 것을 공급하십시오"
이에 세종은 경외의 군사 연습은 내가 마땅히 하도록 하겠지만 평안도가
피폐해진 것을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를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한다.
김종서는 자신이 평안도 형세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폐단을 구제할 방도를
자세히 아뢸 수 없으니 그 도의 감사와 각급 변장에게 유시를 내리어 탐문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세종은 이 말에서 깨달은 바 있어 일찍이 평안도를 다스려본 경험이 있는
문무 중신들을 모두 불러서 그들의 의견을 수렴하게 되는데 중추원사 이천
(1376~1451), 예문관 대제학 박안신(1369~1447), 이조참판 조극관(?~1453),
중추원부사 성승(?~1456), 호조참의 정척(1390~1475)등 수십명이 각기 제
나름대로의 의견을 개진하였으나 의논만 분분하고 의정부에서 논의된 이상의
묘책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세종은 김종서가 진언한대로 평안도 감사에게 이런 유서를 내린다.
"여러 신하들이 아뢰는 바가 갈라져서 같지 않고 멀리서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경은 이 의논을 가지고 도적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구한
방책을 도절제사와 함께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이렇게 군비 증강을 부르짖는 김종서이기 때문에 세종은 8월 18일 문무과의
중시를 치르는데 김종서로 하여금 여섯째 왕자인 금성대군과 함께 광화문
밖에 나가 무과 시험을 관장하게 한다.
그리고 9월 1일에는 세종이 평안도의 비축미가 태종때만 하여도 백만여석
이나 있었는데 자신의 즉위시에 벌써 다 없어져서 창고가 바닥난 이래 계속
흉년이 들어 창고가 비어 있다며 만약 크게 쓸 일이 생기면 어떻게 나라에서
갑자기 변통할 수 있겠느냐면서 그 대책을 묻자 김종서는 하연과 함께
상인들로 하여금 무명등 하삼도 특산품을 가지고 평안도로 들어가 곡식으로
거래하여 관에 바치게 하고 그 대가는 하삼도의 관곡으로 받아가되 조금
우대해 주는 방법으로 관의 창고를 채우도록 하자는 의견을 제시한다.
이에 대해 박종우와 정분 등은 상인들의 농간으로 백성과 관이 모두
피해를 볼 우려가 있으니 관에서 하삼도의 곡식을 직접 실어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종은 양쪽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다며 조금 더 생각하여 처리하자고
미루어둔다.
그런데 10월 29일에 왜구에게 납치되어 갔었던 중국 절강성 사람 12명을
대마도로부터 인계받아(9월 6일에 출발) 중국으로 압송해 가던 압송관
김유례가 요동에서 급히 보고하기를 와랄야선이 황하 상류에 군사 수만을
주둔하고 있으며, 장차 조선까지 뒤흔들지 모른다는 황제의 칙유가 있었다고
한다.
이에 세종은 김종서 등 의정부 대신들을 불러 이렇게 말한다.
"지금 야선이 요동을 버리고 멀리 우리나라를 치는 일은 없겠지만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지난 번에 그 나라 조서를 받들지 않았으니 혹 이것으로
인하여 그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거나 혹은 항복을 받으려 하여 침략할
염려도 없지 않으므로 양계의 방어를 늦출 수 없다. 생각컨대 기마병은
보낼 수 없을 듯하고 연변 군읍에 보병과 화포기구를 보태어 성을 지키며
기다리면 어떻겠는가"
김종서는 박종우 등과 함께 연변 주군에 군사가 넉넉한 곳은 그만두고
부족한 곳에만 남쪽 주군의 보병을 나누어 보내어 성을 지키게 하고 군사와
전마와 갑주를 미리 정돈해 두었다가 소식이 있으면 곧 운반해 보내도록
하자고 건의한다.
그리고 11월 1일에 전시에 대비한 인사개편을 단행하여 김세민(1401~86)을
병조판서로 하고 김효성(?~1454)을 평안도 도절제사, 이양(?~1453)을 강계
절제사, 박호문을 삭천 절제사, 조석강(?~1453)을 의주목사로 발령하자
김종서는 김효성 집안이 대대로 청백하고 빈한한데 근래 아내의 죽음으로
생계가 더욱 어려워졌으니 따뜻한 옷 한벌을 내려주라고 임금께 주청한다.
이에 세종은 속에 종이를 넣어 만든 솜 둔 갑옷 한벌과 털모자 및 활과
화살을 보내주게 된다.
김효성은 김종서가 일찍부터 그 능력을 인정하여 함길도 조전첨절제사와
함길도 도절제사로 천거했었던 인물인데 이번에도 평안도가 위태로워지자
그 군사 책임을 총괄하는 도절제사의 임무를 맡기도록 극력 추천하고 그도
부족하여 이와 같이 의관과 궁시의 하사를 청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김효성은 뒷날 수양대군에게 빌붙어 김종서를 제거하는 일에
앞장서는 배은망덕을 저지르고 만다.
야선의 침공에 대비하여 평안도의 방비가 어느 정도 갖추어지자 세종은
세종30년(1448) 3월 7일에 함길도의 방비도 점검하는데 이미 함길도는
김종서가 오랫동안 도절제사로 재임하면서 두만강 연변에 장성을 쌓기 시작
하여 그 역사가 이제 거의 완성단계에 있었고 경원 회령 경흥은 석성으로,
종성과 온성은 토성으로 완고하게 그 읍성을 쌓아 놓았으므로 큰 걱정이
없게 되니 요해처에 목책을 더 설치하자는 것으로 그 논의를 끝낸다.
그리고 4월 3일에 원손 홍위를 왕세손으로 책봉한다.
세종은 52세였고 왕세손은 8세였는데 이미 66세의 노인이 되어 있던
김종서는 장차 이 어린 왕세손의 왕위를 지켜 주려다가 5년 뒤인 71세때
수양대군에게 무참히 살해되고 만다.
그러나 이때 누가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날 줄 꿈엔들 생각하였었겠는가.
부조 양왕이 건재하고 조정의 만조백관이 충성을 맹세하며 경하해 마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해 봄 여름 가뭄이 몹시 심하여 밀 보리의 수확이 불가능해졌고
못자리 싹도 다 타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우찬성 김종서는 천재가 인사의 잘못으로 연유할 수 있으므로 고치고
반성할 일을 7조로 열거하여 상소한다.
1 죄인의 가족을 모두 변경으로 옮겨 살게 하는 것은 가장의 죄를 죄없는
가족에게 전가하는 것이니 정지해야 하며, 2 평안도는 중국과 잇닿아서
부역의 번잡함과 방수의 노고가 타 도의 배가 되니 백성의 부담을 덜어서
그 폐단을 구제해야 하고, 3 형옥을 너그럽게 하며, 4 행수직을 변통하여
관료의 승진을 원활하게 하고, 5 각 사의 부유한 노비들이 함부로 공장에
속하는 것을 금하며, 6 사치를 엄금하여 사대부층부터 혼례에 능라를 쓰지
못하게 하고, 7 가뭄이 극심하니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것 이외의 일체
토목공사는 중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세종은 5월12일 세자를 통해 의정부 대신들에게 조목조목
7조의 내용을 따져 김종서의 지적이 타당하다고 동의하여 대답하며 그
대답에 이의가 있는지를 의논하여 아뢰라고 한다.
이에 하연 황보인 박종우 정분 등이 물러 나와 의논하고 김종서의 주장을
받아들인 세종의 뜻을 따르기로 한다.
그리고 이미 지난해 9월 9일 평안감사로 발령하였었던 한확(1403~56)에게
7월 1일에 평안도 병마도절제사를 겸직하게 한다.
야선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명나라 황실에 두 누이를 시집보낸
한확에게 평안도를 맡기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런 무리한
인사를 감행하였던가 보다.
이것이 전례가 되어 이후 평안감사는 으레 병마도절제사를 겸직하게 되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25일자).
구체적인 계책을 대신 중신들에게 하문하니 좌의정 하연은 하삼도에서
인구비례에 따라 한군에서 한두명씩 군사를 선발하여 그 고을에서 의복과
양식을 준비해 주어 평안도로 보내어 윤번으로 방어를 맡게 한다면 일의
처리가 쉽고 평안도 백성들은 어깨를 쉴 수 있을 것이라고 간단하게 대답
한다.
이에 김종서는 그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아뢴다.
"신이 일찍이 함길도를 진무함에 활 쏘는 군사가 심히 많았었고 경상도를
순찰함에는 병사가 많았었으나 모두 정예하지 않았었습니다. 평안도는 비록
아직 목격하지는 못하였습니다만 그러나 변경의 장수들에게 물어서 사졸의
허약함과 병장기와 성채의 미비를 깊이 알고 있습니다. 최윤덕이 세상을
떠나면서 신에게 "평안도는 실로 외적을 받는 문과 뜰(문정)인데 국가가
지키고 방어함이 진실로 엉성하고 걱정스럽게 되어 있다. 내가 병이 심하여
아직 상서하지 못하였는데 다행히 그대와 더불어 이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이와 같이 그대로 둔다면 내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신도 역시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도적 수만이
와서 침범하는 일이 있다면 평안도의 허약한 병졸과 해진 갑옷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터이니 방비하여 막을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뒤이어 김종서와 어린 시절 공주 요당면에서 함께 자라나 김종서와 뜻을
같이 하는 좌참찬 정분이 이렇게 거들어 말한다.
"신이 평안도 감사를 하였기에 그 도의 일을 모두 아는데 근년에 기근이
계속되어 백성들이 가난하니 병장기를 새롭게 하고 타는 말을 충실하게
하려 한다면 비록 가산을 다 팔아 없앤다 해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백성들이 일찍이 말하기를 행성을 쌓으면 수자리 사는 부역이 조금
풀리려나 했더니 이제 행성을 이미 다 쌓았는데도 수자리 사는 군졸을
줄이지 않아 휴식할 기약이 없다. 성 쌓은 공이 어디 있는가 라고 했습니다.
행성을 이미 쌓은 땅으로는 좀도둑이 갑자기 들어올 수 없을 듯하니 변방
지키는 군사의 수효를 헤아려 줄이고 병장기는 사사로이 마련할 수 없으니
관가에서 저장해 둔 것을 공급하십시오"
이에 세종은 경외의 군사 연습은 내가 마땅히 하도록 하겠지만 평안도가
피폐해진 것을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를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한다.
김종서는 자신이 평안도 형세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폐단을 구제할 방도를
자세히 아뢸 수 없으니 그 도의 감사와 각급 변장에게 유시를 내리어 탐문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세종은 이 말에서 깨달은 바 있어 일찍이 평안도를 다스려본 경험이 있는
문무 중신들을 모두 불러서 그들의 의견을 수렴하게 되는데 중추원사 이천
(1376~1451), 예문관 대제학 박안신(1369~1447), 이조참판 조극관(?~1453),
중추원부사 성승(?~1456), 호조참의 정척(1390~1475)등 수십명이 각기 제
나름대로의 의견을 개진하였으나 의논만 분분하고 의정부에서 논의된 이상의
묘책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세종은 김종서가 진언한대로 평안도 감사에게 이런 유서를 내린다.
"여러 신하들이 아뢰는 바가 갈라져서 같지 않고 멀리서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경은 이 의논을 가지고 도적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구한
방책을 도절제사와 함께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이렇게 군비 증강을 부르짖는 김종서이기 때문에 세종은 8월 18일 문무과의
중시를 치르는데 김종서로 하여금 여섯째 왕자인 금성대군과 함께 광화문
밖에 나가 무과 시험을 관장하게 한다.
그리고 9월 1일에는 세종이 평안도의 비축미가 태종때만 하여도 백만여석
이나 있었는데 자신의 즉위시에 벌써 다 없어져서 창고가 바닥난 이래 계속
흉년이 들어 창고가 비어 있다며 만약 크게 쓸 일이 생기면 어떻게 나라에서
갑자기 변통할 수 있겠느냐면서 그 대책을 묻자 김종서는 하연과 함께
상인들로 하여금 무명등 하삼도 특산품을 가지고 평안도로 들어가 곡식으로
거래하여 관에 바치게 하고 그 대가는 하삼도의 관곡으로 받아가되 조금
우대해 주는 방법으로 관의 창고를 채우도록 하자는 의견을 제시한다.
이에 대해 박종우와 정분 등은 상인들의 농간으로 백성과 관이 모두
피해를 볼 우려가 있으니 관에서 하삼도의 곡식을 직접 실어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종은 양쪽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다며 조금 더 생각하여 처리하자고
미루어둔다.
그런데 10월 29일에 왜구에게 납치되어 갔었던 중국 절강성 사람 12명을
대마도로부터 인계받아(9월 6일에 출발) 중국으로 압송해 가던 압송관
김유례가 요동에서 급히 보고하기를 와랄야선이 황하 상류에 군사 수만을
주둔하고 있으며, 장차 조선까지 뒤흔들지 모른다는 황제의 칙유가 있었다고
한다.
이에 세종은 김종서 등 의정부 대신들을 불러 이렇게 말한다.
"지금 야선이 요동을 버리고 멀리 우리나라를 치는 일은 없겠지만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지난 번에 그 나라 조서를 받들지 않았으니 혹 이것으로
인하여 그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거나 혹은 항복을 받으려 하여 침략할
염려도 없지 않으므로 양계의 방어를 늦출 수 없다. 생각컨대 기마병은
보낼 수 없을 듯하고 연변 군읍에 보병과 화포기구를 보태어 성을 지키며
기다리면 어떻겠는가"
김종서는 박종우 등과 함께 연변 주군에 군사가 넉넉한 곳은 그만두고
부족한 곳에만 남쪽 주군의 보병을 나누어 보내어 성을 지키게 하고 군사와
전마와 갑주를 미리 정돈해 두었다가 소식이 있으면 곧 운반해 보내도록
하자고 건의한다.
그리고 11월 1일에 전시에 대비한 인사개편을 단행하여 김세민(1401~86)을
병조판서로 하고 김효성(?~1454)을 평안도 도절제사, 이양(?~1453)을 강계
절제사, 박호문을 삭천 절제사, 조석강(?~1453)을 의주목사로 발령하자
김종서는 김효성 집안이 대대로 청백하고 빈한한데 근래 아내의 죽음으로
생계가 더욱 어려워졌으니 따뜻한 옷 한벌을 내려주라고 임금께 주청한다.
이에 세종은 속에 종이를 넣어 만든 솜 둔 갑옷 한벌과 털모자 및 활과
화살을 보내주게 된다.
김효성은 김종서가 일찍부터 그 능력을 인정하여 함길도 조전첨절제사와
함길도 도절제사로 천거했었던 인물인데 이번에도 평안도가 위태로워지자
그 군사 책임을 총괄하는 도절제사의 임무를 맡기도록 극력 추천하고 그도
부족하여 이와 같이 의관과 궁시의 하사를 청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김효성은 뒷날 수양대군에게 빌붙어 김종서를 제거하는 일에
앞장서는 배은망덕을 저지르고 만다.
야선의 침공에 대비하여 평안도의 방비가 어느 정도 갖추어지자 세종은
세종30년(1448) 3월 7일에 함길도의 방비도 점검하는데 이미 함길도는
김종서가 오랫동안 도절제사로 재임하면서 두만강 연변에 장성을 쌓기 시작
하여 그 역사가 이제 거의 완성단계에 있었고 경원 회령 경흥은 석성으로,
종성과 온성은 토성으로 완고하게 그 읍성을 쌓아 놓았으므로 큰 걱정이
없게 되니 요해처에 목책을 더 설치하자는 것으로 그 논의를 끝낸다.
그리고 4월 3일에 원손 홍위를 왕세손으로 책봉한다.
세종은 52세였고 왕세손은 8세였는데 이미 66세의 노인이 되어 있던
김종서는 장차 이 어린 왕세손의 왕위를 지켜 주려다가 5년 뒤인 71세때
수양대군에게 무참히 살해되고 만다.
그러나 이때 누가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날 줄 꿈엔들 생각하였었겠는가.
부조 양왕이 건재하고 조정의 만조백관이 충성을 맹세하며 경하해 마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해 봄 여름 가뭄이 몹시 심하여 밀 보리의 수확이 불가능해졌고
못자리 싹도 다 타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우찬성 김종서는 천재가 인사의 잘못으로 연유할 수 있으므로 고치고
반성할 일을 7조로 열거하여 상소한다.
1 죄인의 가족을 모두 변경으로 옮겨 살게 하는 것은 가장의 죄를 죄없는
가족에게 전가하는 것이니 정지해야 하며, 2 평안도는 중국과 잇닿아서
부역의 번잡함과 방수의 노고가 타 도의 배가 되니 백성의 부담을 덜어서
그 폐단을 구제해야 하고, 3 형옥을 너그럽게 하며, 4 행수직을 변통하여
관료의 승진을 원활하게 하고, 5 각 사의 부유한 노비들이 함부로 공장에
속하는 것을 금하며, 6 사치를 엄금하여 사대부층부터 혼례에 능라를 쓰지
못하게 하고, 7 가뭄이 극심하니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것 이외의 일체
토목공사는 중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세종은 5월12일 세자를 통해 의정부 대신들에게 조목조목
7조의 내용을 따져 김종서의 지적이 타당하다고 동의하여 대답하며 그
대답에 이의가 있는지를 의논하여 아뢰라고 한다.
이에 하연 황보인 박종우 정분 등이 물러 나와 의논하고 김종서의 주장을
받아들인 세종의 뜻을 따르기로 한다.
그리고 이미 지난해 9월 9일 평안감사로 발령하였었던 한확(1403~56)에게
7월 1일에 평안도 병마도절제사를 겸직하게 한다.
야선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명나라 황실에 두 누이를 시집보낸
한확에게 평안도를 맡기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런 무리한
인사를 감행하였던가 보다.
이것이 전례가 되어 이후 평안감사는 으레 병마도절제사를 겸직하게 되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