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안보리의장국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우리나라와 국제연합은 역사적으로 특수 관계에 있다.
오죽 인연이 깊었으면 회원국이 아니면서 "유엔의 날" (10월24일)을
공휴일로 지냈고 지금도 기념일로 지정하고 있을까.
국제연합은 냉전 와중에서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동구권이 무너진뒤 국가간 분쟁 해결이나 인류사회 발전을
모색하는 국제기구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우리와의 인연은 광복후인 47년 10월19일 제2차 유엔총회에서 유엔위원단
한국파견을 결의한데서 비롯된다.
48년 1월 유엔 한국위원회 대표단이 서울에 와 총선거안을 논의했으나
소련측이 북조선입경을 거부함으로써 "가능지역 선거안"이 채택됐고
5월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게 됐다.
정부수립후 12월12일 유엔총회는 한국정부를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승인했다.
우리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의 관계는 49년 1월 유엔가입신청서를
소련이 안보리에서 거부권 행사로 부결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안보리는 총회와 함께 유엔의 최고기관으로 국제평화와 안전 유지에
있어선 총회보다 그 기능이 우선한다.
안보리는 미.영.러.중.프랑스 등 5개 상임이사국과 10개 비상임
이사국으로 구성되는데 상임이사국은 거부권을 행사할수 있다.
이 표결방식은 주권평등 원칙에 위배되지만 얄타회담에서 결정됐으므로
"얄타방식"이라 부른다.
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6월27일 안보리는 유엔군의 파병을 결정한다.
마침 소련은 자유중국 (대만)의 대표권에 항의해 불참했으므로 거부권을
행사할수 없었다.
그렇지만 소련은 수주일 후에 복귀했고 우리나라는 그 뒤 줄곧 유엔
가입이 봉쇄되어왔다.
그러다가 91년 9월17일 "남북한 동시가입"으로 마침내 회원국이 되었으며
96년 1월부터는 2년 임기의 안보리이사국이 되었다.
박수길 유엔대표부 대사가 내일부터 한달간 안보리 의장직을 맡게 된다.
의장은 이사국 국명의 알파벳 순에 따라 윤번제로 맡게 되므로 특별한
정치적 의미는 없다.
그러나 유엔가입 5년만에 비상임이사국에 선출되고 이제 그 의장국으로
활약할수 있게 됐다는 사실은 실로 감회 깊은 일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30일자).
오죽 인연이 깊었으면 회원국이 아니면서 "유엔의 날" (10월24일)을
공휴일로 지냈고 지금도 기념일로 지정하고 있을까.
국제연합은 냉전 와중에서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동구권이 무너진뒤 국가간 분쟁 해결이나 인류사회 발전을
모색하는 국제기구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우리와의 인연은 광복후인 47년 10월19일 제2차 유엔총회에서 유엔위원단
한국파견을 결의한데서 비롯된다.
48년 1월 유엔 한국위원회 대표단이 서울에 와 총선거안을 논의했으나
소련측이 북조선입경을 거부함으로써 "가능지역 선거안"이 채택됐고
5월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게 됐다.
정부수립후 12월12일 유엔총회는 한국정부를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승인했다.
우리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의 관계는 49년 1월 유엔가입신청서를
소련이 안보리에서 거부권 행사로 부결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안보리는 총회와 함께 유엔의 최고기관으로 국제평화와 안전 유지에
있어선 총회보다 그 기능이 우선한다.
안보리는 미.영.러.중.프랑스 등 5개 상임이사국과 10개 비상임
이사국으로 구성되는데 상임이사국은 거부권을 행사할수 있다.
이 표결방식은 주권평등 원칙에 위배되지만 얄타회담에서 결정됐으므로
"얄타방식"이라 부른다.
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6월27일 안보리는 유엔군의 파병을 결정한다.
마침 소련은 자유중국 (대만)의 대표권에 항의해 불참했으므로 거부권을
행사할수 없었다.
그렇지만 소련은 수주일 후에 복귀했고 우리나라는 그 뒤 줄곧 유엔
가입이 봉쇄되어왔다.
그러다가 91년 9월17일 "남북한 동시가입"으로 마침내 회원국이 되었으며
96년 1월부터는 2년 임기의 안보리이사국이 되었다.
박수길 유엔대표부 대사가 내일부터 한달간 안보리 의장직을 맡게 된다.
의장은 이사국 국명의 알파벳 순에 따라 윤번제로 맡게 되므로 특별한
정치적 의미는 없다.
그러나 유엔가입 5년만에 비상임이사국에 선출되고 이제 그 의장국으로
활약할수 있게 됐다는 사실은 실로 감회 깊은 일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