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소프트웨어산업 발전의 견인차인 프로그래머의 세계에는 기인이
많다.

독특한 개성을 살려가며 자신의 일에 충실한 "괴짜"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 전문업체인 S사의 프로그래머인 H씨는 대표적인 케이스.

그는 친구들과 소줏잔을 기울이다가도 프로그램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술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밤 12시, 취한 상태에서 담배를 꼰아물고 시작한 프로그래밍 작업은
이튿날 한낮이 되도록 계속되는 경우가 많다.

프로그래밍을 끝낸 그는 대낮에 퇴근, 꼬박 24시간 잠에 골아떨어지기도
한다.

프로그래머의 세계를 한마디로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일반적인 성향을 추출하다보면 다른 사람들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그들 나름대로의 세계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고독하다.

일의 속성상 자기 혼자 컴퓨터와 씨름해야 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한다.

이런 이유로 프로그래머들은 일반적으로 내성적 성향이 강하다.

더러는 배타적인 행태도 보인다.

"점점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게 겁이 나요.

나 혼자 음악을 듣거나 컴퓨터게임을 즐기는게 훨씬 재미있습니다"
(현대정보기술 김용섭 연구원)

그들은 누구에게 간섭받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자신의 프로그래밍 작업에 누군가 참견해 일을 방해하면 하던 일을
던져버리고 나간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하다.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직장상사 일지라도 망신당하기 일쑤다.

"내가 만든 프로그램이 직장 상사에게 거절당했을 때, 그 굴욕감을 참기
힘듭니다.

회사에 잠시 못나간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여행을 떠나죠.

한적한 곳에서 2,3일 지내다 오면 또 일할 맛이 납니다"(한국기업전산원
박정기 연구원)

그들은 직장에서도 자유롭게 행동한다.

넥타이 정장보다 청바지에 빨간티셔츠, 슬리퍼를 좋아한다.

남의 눈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출퇴근도 자기 마음대로이다.

"내일 내가 하면 되는 것 아니냐"가 이들의 직장관이다.

그들은 별다른 취미생활이 없다.

컴퓨터와 노는게 유일한 취미라고 말하는 프로그래머가 많다.

그러나 한곳에 취미를 붙이면 헤어나지 못하는 속성도 갖고 있다.

폐쇄된 자기만의 공간에서 일하는데 따른 현상이다.

한글과컴퓨터의 백순백 상무는 발레스키가 취미.

그는 자신의 인터넷홈페이지에 발레스키 코너를 만들어 놓고 동호인을
모으고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발레스키를 아느냐"고 묻곤 한다.

밤이라야 더 생산성이 오른다며 굳이 밤에 출근하려 하는 사람, 애인과
데이트하던 사실을 잊고 길가 컴퓨터 게임방에 들어가 혼자 놀다가 실연당한
사람, "삼손의 머리"를 자랑하는 남자 등...

프로그래머의 세계에는 무수한 괴인들이 활동하고 있다.

프로그래머들은 "프로"다.

남들이 사용하기에 편하고 유익한 프로그램을 만들고야 말겠다는 강한
직업근성으로 똘똘 뭉쳐 있다.

그들의 프로근성이 우리나라 소프트웨어산업을 이끌어가는 최고의 힘이다.

< 한우덕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