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요즘, 어린이들 사이에서는
말끝마다 "증거 있어"라고 묻는 어투가 유행처럼 빠른 속도로 번져나가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교사가 잘못을 꾸짖을 때도 "증거 있어요"하고 당돌하게 대드는
아이까지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유행어가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식의 한결같은 증인들의 답변으로
별 소득없이 막을 내린 국회 청문회가 몰고온 무서운 결과다.

요식행위의 하나로 치러진 한보청문회가 우리 모두의 꿈이요, 희망인
어린이들에게까지 증거만 없으면 어떤 나쁜 짓을 해도 괜찮다는 사고방식을
심어주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큰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중국의 옛 책인 "설원"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제나라의 환공이 관중에게 "나라의 가장 큰 근심거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관중은 "사당쥐"가 가장 큰 근심거리라고 대답했다.

임금을 측근에서 보필하고 있어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권력자들을 아무나
허물어버리지 못하는 사당에 사는 쥐에 비유한 그는, 이들이 안으로는
임금이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게 하고 밖으로는 백성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는 점을 조리있게 설명했다.

그리고는 "사당쥐"들은 잡아죽이는 것이 마땅하지만 임금의 뱃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죽이기도 어렵다는 직언도 서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문민정부에서도 예외없이 "사당쥐"들이 들끓고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연초부터 국민의 관심은 온통 "사당쥐잡기"에 쏠려 있다.

대통령의 인기는 물론 정부에 대한 신뢰도 밑바닥까지 추락했다.

특히 대통령의 대중적 이미지는 극도로 악화돼 있다.

일반적으로 대중은 유능한 지도자를 좋아한다.

그러나 대중의 기호는 꼭 능력에만 쏠리는 것은 아니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접근하기 어려워 거리감이 생기기 쉽고 초인간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대중은 오히려 약간 결점이 있는 사람에게 더 호감을 갖게
된다는게 심리학자들의 연구결과로 나타나 있다.

이런 점은 아마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성격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사회심리학에는 "실수효과"라고 부르는 이론이 다뤄지고 있다.

능력있는 사람의 실수가 호감을 더 주게 되어 그를 더욱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고 똑같은 실수가 못난 사람을 더욱 못나보이도록 한다는 실험
결과를 토대로 등장한 이론이다.

실수도 인간의 매력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인
셈이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엘리어트 애런슨은 케네디 대통령의 경우를 사례로
들어 "실수효과"를 설명한다.

1961년 쿠바침공에 실패한 직후의 갤럽여론 조사에 의하면 케네디
대통령의 인기는 오히려 급상승했다.

"피그만의 대실패"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사건은 일국의 대통령이 저지른
커다란 실수였는데도 말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그 실패에 대한 핑계를 대거나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 실패의 모든 책임을 용감히 지고 나섰다.

이런 사심없는 행동이 대중의 눈에 그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는
것이 애런슨의 분석이다.

"사심없는 책임감" "솔직성"이 "실수효과"를 유발시키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이 사례는 국정책임자의 사심없는 책임감과 솔직성이 국민의 생각을
바꾸어 놓을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 국민들은 부정부패가 어쩔도리가 없는 것이라고 체념했을 때는
그것을 참을성있게 견디어 왔다.

과거의 정권때는 그랬다.

그러나 문민정부에 들어와 과거악습인 부정부패에 대한 감수성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예리해졌다.

오늘날 문민정부의 도덕성이 첨예하게 문제시 되고 있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만 보아도 당연한 일이다.

"사당쥐잡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도 정계는 12명이나 되는 대선
예비주자들이 춘추전국시대처럼 세력을 겨루는 각축장이 되어 시끌벅적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당사자인 대통령이 과거의 엄청난 대선자금에
대해서도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언론이 높아져 가고 있다.

이 난국의 유일한 해결책은 하루속히 "사당쥐"들의 좌상을 숨김없이
밝혀낸 뒤 대통령이 그동안의 실수가 있었다면 솔직히 국민앞에 털어놓고
다시 한번 사죄하는 길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통령과 국민의 의사소통이 안되면 결코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갖가지
의혹만 증폭돼 갈 것이 뻔하다.

초등학교 어린이가 틀린 산수문제의 답을 재빨리 지우개로 지운뒤 고쳐
놓고는 생글거리며 "증거 있어요"한다면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