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세계 11위의 허상 .. 최필규 <국제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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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뛰놀던 놀이터에 대신 자리잡고 있는 거만한 붉은 주택들.
자동차에 앉아있는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
지붕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사무실에서 때묻은 서류를 뒤적이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 나오는 귀절이다.
학창시절 이 대목은 무척이나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난 지금 이 말들은 오히려 사치스럽게 들려 온다.
왜일까.
젊었을 때의 감정이 무뎌진 탓일까.
그보다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하도 많아 이정도로는 슬픔을 감지할
수 없는 것이다.
사색의 여유가 사라진지 오래다.
민초들은 그들의 발걸음에서부터 "깊은 슬픔"을 느낀다.
횡단보도를 반쯤 건너면 으례히 신호등은 깜박깜박거린다.
보행자들의 걸음을 재촉한다.
뛰다시피 건너야 한다.
분명히 보행자신호가 켜져있는 상태지만 우회전하는 차들은 사람들을
밀치고 달아난다.
사회적 약속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녹색신호등을 믿기 보다는 생존본능에 따라 주위를 먼저 살피고 "비장한
각오"로 결단을 내려야 한다.
한국사회의 수준이다.
그러니 코미디와 교통질서캠페인을 적절히 배합한 모 방송국프로가
서울시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교통질서 의식고취공로로.
사회의 믿음과 약속이 교통신호등에서부터 무너져 내려앉는 사회는 흔치
않다.
뒤에서 울리는 클랙슨소리에 서민들은 비좁은 골목길에서조차 비껴서야
한다.
마음놓고 걸어다닐 "길"조차 없는 것이다.
사람이 더이상 사람취급받지 못하는 사회가 돼가고 있다.
그래서 출퇴근길은 우리를 무척이나 슬프게 한다.
옛 미풍양속이 퇴색, 왜곡돼가고 있는 것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다.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이른바 "떡값"도 사실은 우리사회에서 관례화된
정나누기의 풍속이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떡값이란 설이나 추석명절 때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주는 특별수당을 뜻해왔다.
정말로 필요한 떡을 차리기에 흡족할만한 정도의 액수였다.
가족들의 떡배를 채울만한 분량의 떡을 사고 나면 소진될 그런 정도의
돈이 떡값이다.
그런데 지금 정치권에서 말하는 떡값은 도대체 얼마를 말하는 것일까.
봉급쟁이들은 동그라미 몇개인지 어림잡기도 힘든 5조원이라는 돈을
부실기업에 대출해주고 그 과정에 개입해 "떡값"챙긴 힘센 사람들을 연상할
때 슬픔이 북바쳐 오르는 것이다.
그런데도 1,2억원이 떡값이었다는 말장난들을 하고 있다.
정계 재계가 심하게 재편될 때마다 돈도 숨가쁘게 움직여왔다.
"위험한 다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현금이 최강의 무기처럼 사용되고 있다.
지금은 돈이 사람을 밀어낸 사회다.
금력으로 굴복시키는 분위기의 사회다.
따지고 보면 신호등을 안지키는 버스나 택시들도 돈의 노예가 되어 있는
탓이다.
"넥타이 부대"들의 거친 자가운전도 시대상황을 반영한 측면이 있다.
아침신문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대담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한국이란 조그만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함때문이다.
우리나라 뉴스가 남의 나라 신문의 톱뉴스자리를 차지할 때도 허다하다.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나라가 됐다.
이어령 교수의 말대로 우리는 일본의 축소지향형 문화와는 달리
확대지향형이어서 일까.
우리는 잘사는 나라들의 모임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했다는
것으로 만족해선 안된다.
GNP(국민총생산)수준으로 세계11위에 올랐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행복의 척도로 잰 지수가 있다면 과연 몇 위나 될까.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들이 폭발하고 있는 현실.
지켜야 되며 지켜져야 할 것들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제 다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안톤 슈낙이 슬프다고 느꼈던 것들을 우리도 슬프게 느낄줄 아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어느 어린아이의 손에 쥐어진 펜촉의 끄적거림에서도 사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9일자).
자동차에 앉아있는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
지붕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사무실에서 때묻은 서류를 뒤적이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 나오는 귀절이다.
학창시절 이 대목은 무척이나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난 지금 이 말들은 오히려 사치스럽게 들려 온다.
왜일까.
젊었을 때의 감정이 무뎌진 탓일까.
그보다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하도 많아 이정도로는 슬픔을 감지할
수 없는 것이다.
사색의 여유가 사라진지 오래다.
민초들은 그들의 발걸음에서부터 "깊은 슬픔"을 느낀다.
횡단보도를 반쯤 건너면 으례히 신호등은 깜박깜박거린다.
보행자들의 걸음을 재촉한다.
뛰다시피 건너야 한다.
분명히 보행자신호가 켜져있는 상태지만 우회전하는 차들은 사람들을
밀치고 달아난다.
사회적 약속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녹색신호등을 믿기 보다는 생존본능에 따라 주위를 먼저 살피고 "비장한
각오"로 결단을 내려야 한다.
한국사회의 수준이다.
그러니 코미디와 교통질서캠페인을 적절히 배합한 모 방송국프로가
서울시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교통질서 의식고취공로로.
사회의 믿음과 약속이 교통신호등에서부터 무너져 내려앉는 사회는 흔치
않다.
뒤에서 울리는 클랙슨소리에 서민들은 비좁은 골목길에서조차 비껴서야
한다.
마음놓고 걸어다닐 "길"조차 없는 것이다.
사람이 더이상 사람취급받지 못하는 사회가 돼가고 있다.
그래서 출퇴근길은 우리를 무척이나 슬프게 한다.
옛 미풍양속이 퇴색, 왜곡돼가고 있는 것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다.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이른바 "떡값"도 사실은 우리사회에서 관례화된
정나누기의 풍속이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떡값이란 설이나 추석명절 때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주는 특별수당을 뜻해왔다.
정말로 필요한 떡을 차리기에 흡족할만한 정도의 액수였다.
가족들의 떡배를 채울만한 분량의 떡을 사고 나면 소진될 그런 정도의
돈이 떡값이다.
그런데 지금 정치권에서 말하는 떡값은 도대체 얼마를 말하는 것일까.
봉급쟁이들은 동그라미 몇개인지 어림잡기도 힘든 5조원이라는 돈을
부실기업에 대출해주고 그 과정에 개입해 "떡값"챙긴 힘센 사람들을 연상할
때 슬픔이 북바쳐 오르는 것이다.
그런데도 1,2억원이 떡값이었다는 말장난들을 하고 있다.
정계 재계가 심하게 재편될 때마다 돈도 숨가쁘게 움직여왔다.
"위험한 다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현금이 최강의 무기처럼 사용되고 있다.
지금은 돈이 사람을 밀어낸 사회다.
금력으로 굴복시키는 분위기의 사회다.
따지고 보면 신호등을 안지키는 버스나 택시들도 돈의 노예가 되어 있는
탓이다.
"넥타이 부대"들의 거친 자가운전도 시대상황을 반영한 측면이 있다.
아침신문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대담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한국이란 조그만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함때문이다.
우리나라 뉴스가 남의 나라 신문의 톱뉴스자리를 차지할 때도 허다하다.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나라가 됐다.
이어령 교수의 말대로 우리는 일본의 축소지향형 문화와는 달리
확대지향형이어서 일까.
우리는 잘사는 나라들의 모임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했다는
것으로 만족해선 안된다.
GNP(국민총생산)수준으로 세계11위에 올랐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행복의 척도로 잰 지수가 있다면 과연 몇 위나 될까.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들이 폭발하고 있는 현실.
지켜야 되며 지켜져야 할 것들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제 다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안톤 슈낙이 슬프다고 느꼈던 것들을 우리도 슬프게 느낄줄 아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어느 어린아이의 손에 쥐어진 펜촉의 끄적거림에서도 사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