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열전] (19) 절재 김종서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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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32년(1450) 2월 17일 세종대왕이 돌아가자 세자이던 문종이 2월 22일
에 즉위하게 된다.
이때 김종서는 평안도에서 세종의 부음을 듣고 주야로 달려서 서울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서 문종이 즉위하고난지 이틀만에 서울에 당도하여 세종의 영전에
통곡으로 귀경을 보고드리게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자신의 충성과 신의를 믿어주던 세종이 타계하였다는
사실은 김종서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다행히 새로 등극한 문종 역시
세종의 뜻을 잘 헤아리고 있었기 때문에 김종서에 대한 믿음이 거의 절대적
이었다.
김종서도 그런 문종의 신뢰감에 보답하기 위해서 4월 20일에는 변방 방비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장문의 상소로 개진하여 각 주군의 요해처에 성을 쌓아
야선군의 침입에 대비할 것을 간절히 요청하게 된다.
영의정 하연을 비롯하여 좌의정 황보인 등이 야선의 목적이 중원 정벌에
있으니 우리나라를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를 반대하지만 김종서는
"하루아침에 적의 기병이 압록강에 이른 연후에야 비로소 도모하려
하십니까"하고 사전 방비가 최선책인 것을 강조한다.
김종서를 굳게 믿어 국경방비의 전권을 맡겼었던 세종의 옛일을 잘 알고
있던 문종은 이 논의에 있어서 결국 김종서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다.
그리고 그동안 김종서의 노고를 포상하기 위해 7월 6일에는 김종서를
정일품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으로 승진시키니 우찬성 자리를 지킨지
5년만에 이루어지는 승진이었다.
이때 좌찬성 박종우는 실직을 박탈당하고 품계만 한등 올려 성록대부로
삼고 있다.
겸해서 김종서는 9월 1일에 지경연사가 되어 임금의 학업을 돕는 경연의
총책임을 맡고, 12월 15일에는 아무래도 평안도가 불안하므로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어 평안도의 군비현황을 점검하러 다시 평안도로 내려간다.
이때 김종서는 그 장자인 김승규를 수행시키는데 영의정 하연 등이 68세의
노대신인 김종서가 삭풍이 몰아치는 평안도 변경으로 섣달보름날 국경방비를
점검하러 떠나는 것을 미안하게 여겨 이를 수행시키자고 건의하였고 문종이
이를 가납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김승규는 모친의 상을 당하여 복상 중에 있었는데 기복시켜 이를
수행해 가게 하였다니 김종서는 부인의 상을 당하고서도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이와같이 국사에만 전념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녕 멸사봉공의 화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종서는 평안도에 도착하여 정주목사 홍익생을 요동으로 보내어 적정을
탐문케 하는데, 문종 원년(1451) 1월 4일 홍익생은 야선과 탈탈불화 왕이
무수한 군대를 거느리고 불라출에 이르렀다가 야선 군대만 행방을 모르게
사라졌으니 우리나라로 향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다는 보고를 해온다.
이에 김종서는 급히 이 대비책을 강구하고 다시 통사 김신을 요동으로
보내어 적정을 탐문케 한다.
1월 22일 김신은 요동에서 탈탈과 야선의 동향을 보고하며 그 군대가 조선
으로 향할 것 같지 않다고 알려온다.
이에 문종은 계엄을 해제해도 좋으나 김종서의 판단에 맡기겠노라는 전지를
보내어 국경방어를 전적으로 김종서에게 일임하던 세종대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내외에 표방한다.
김종서는 문종의 이런 신임에 감읍하여 야선의 침공이 급박하지 않으리라는
판단아래 3월 13일에는 일부 방비군만 남겨두고 증원군은 모두 해산한 다음
상경한다.
얼음이 풀리면 북적의 도강이 어려워 침략 가능성이 희박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종서는 상경하고 나서도 군비강화책을 끊임없이 주장하니 6월
21일에는 활과 화살의 정비를 주청하고 6월 28일에는 함길도의 온성과 종성
및 평안도의 삭주와 용천의 읍성 축수를 서둘러야 한다고 아뢴다.
그런데 7월 1일 경연에서 도승지 이계전은 근래 성균관이 교화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여 인재를 제대로 교양하지 못하니 문덕이 높은 대신을
지성균관사로 임명해야 한다고 하며 김종서를 추천한다.
이에 문종은 "그렇다. 김종서는 본디 지춘추관사의 직책을 띠었으니 또한
성균관사를 맡을만 하다"고 만족해 하면서 김종서를 지성균관사에 임명할
결심을 하고 다음날인 7월 2일에 바로 김종서를 지성균관사에 임명한다.
성균관사를 맡은 김종서는 7월 28일에 대성전과 동무 서무 동재 서재의
비 새는 것을 모두 수리하고 난간과 담장 무너진 것도 보수하여 악기수장고
를 따로 짓고 각사에 파견되어 있는 양현고 노비를 쇄환하는 등의 일을
문종에게 주청하여 허락을 얻어낸다.
경연과 춘추관 성균관의 총책을 겸하였으니 김종서는 문한의 요직을
일신에 겸대한 셈이었다.
그러니 성균관의 대대적인 수리를 요청하는 김종서의 청을 어찌 문종이
들어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드디어 8월 25일에는 지춘추관사 김종서 등이 "고려사" 편찬을 끝마치고
새로 편찬한 "고려사" 1백39권을 바치면서 전문을 올리는데 당연히 그
전문의 찬자는 지춘추관사인 김종서였다.
그런데 현존하는 "고려사"의 전문에는 정인지가 그 찬자로 되어있다.
뒷날 정인지가 수양대군에게 빌붙어 김종서를 제거한 다음 김종서가 차지
하고 있던 자리를 모두 차지하고 나서 "고려사" 전문조차 그가 지은 것처럼
그의 이름으로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또한 문종은 이해 10월 27일에 김종서를 의정부 우의정으로 승차시켜
정승의 반열에 들게 한다.
황희에 뒤이어 세종 31년(1449)부터 영의정에 올라 있던 하연이 76세의
고령으로 치사를 청하자 문종은 즉각 이를 수락한 다음 김종서와 뜻을 같이
하는 좌의정 황보인을 영의정으로 하고 안평대군의 장자 의춘군 우직(1441~
53)의 장인인 우의정 남지를 좌의정으로 차례로 승진시킴으로써 실상
김종서 내각을 이루어 놓는다.
세종이 염원하였으나 미처 이루지 못하였던 정국개편을 문종이 단숨에
이루어낸 것이다.
자신이 병약하고 수양대군의 야심이 만만치 않은 것을 잘 아는 문종은
나이 어린 왕세자의 앞날을 걱정하여 김종서 내각으로 하여금 이를 지켜주게
하기 위해 이런 내각개편을 결행하였던 것이다.
우유부단한 하연이 영의정으로 있으면 유사시에 의정부가 수양대군을 제압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군마의 동원을 책임맡는 사복시 제조의 직책을 계속 김종서에게
맡기고자 하는데 의정이 되면 도제조로 직책이 높아져야 하나 사복시
도제조의 직제가 없다 하므로 부제조직을 신설하여 김종서의 심복인 조순생
(?~1454)에게 이를 맡기고 제조의 임무를 계속 겸대하게 하는 특전을 베풀어
계속 군마관할권을 장악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11월 1일에는 김종서가 도승지 이계전을 통해 의정이 되어
지춘추관사의 임무를 겸대하지 못하므로 "여사장편(고려사절요를 일컫는다)"
의 편찬을 거의 다 완성해가는데 이를 마음놓고 마무리지을 수 없다는 뜻을
임금께 아뢰게 하니 문종은 정도전의 전례에 따라 영춘추관사를 겸대하여
이를 마무리짓도록 하라는 특명을 내린다.
그리고 11월 28일에는 김종서가 명년에 나이가 70이 차게되므로 벼슬에
나오지 않겠다고 치사를 청하자 문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출사할
것을 명령한다.
그런데 11월 29일에는 성균관의 생원인 김안경 등이 김종서를 영성균관사로
삼아달라는 상소를 올린다.
그 내용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하늘이 낸 성명과 밝은 정치를 이어갈
만한 공경심으로 보위를 이으시고 날마다 경연에 나오시어 학교를 일으킬
방도를 강구하시다가 좌찬성 김종서에세 특명으로 지성균관사를 겸대하게
하여 학교의 책임을 맡기셨었습니다.
종서는 학문이 경학과 사학에 통달하고 도덕과 문장이 모범을 삼고 본받을
만 하여 가히 진신의 영수요 사림의 표준이라 일컬을 수 있습니다.
명령을 받은 이래 성상께서 위임하신 막중한 임무를 저버릴까 두려워하여
생각을 두루 하지 않음이 없었고,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사문
을 일으키는 것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았기 때문입니다.
신 등은 안색을 살피고 덕을 생각함에 우러르기를 태산과 북두와 같이
합니다.
이제 우의정으로 뽑아 올렸으나 영성균관사를 겸한다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 신 등이 생각하기로는 종서로써 성균관일을 겸하게 하면 장차
사문에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성인의 덕으로서도 달로 기약해도 좋다 하였으나 3년만에 이루었는데
하물며 인재를 만들어내는 것이 대체 어찌 일조일석에 능히 반드시 해낼 수
있겠습니까.
그 임직에 오래 있은 연후에 그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 등의 미친 듯 어리석은 죄를 용서하시고
신 등이 학교를 일으키려는 정성을 가련히 여기시어 특별히 유음을 내리시어
종서로 하여금 우의정으로 영성균관사를 겸하게 하시면 오직 학교를
이어가는데 다행일 뿐만 아니라 성세에 문풍을 숭상하고 교화를 일으키는
정치에 상당한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2월 2일에는 "세종실록"을 편찬하는데 이를 감수하는 사람이 모두 세종조의
대신들이라 사관들이 이들의 눈치를 보느라 직필하지 못한다는 여론에 따라
사초를 보관해 두었다가 수십년 지난뒤에 이를 바탕으로 실록을 편찬하자는
의논이 있게 되니 김종서는 "세종실록" 편찬의 감수를 사양하면서 실록
편찬은 대신이 담당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그리고 2월 6일에는 연로한 이유를 들어 "세종실록"을 편찬하는 일의
감수를 사양한다.
이에 문종은 "무릇 일이란 모름지기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경은 세종의 옛 신하가 되었었으니 이미 시작이 있었다. 이제
세종의 일이 이미 끝났으니 경은 마땅히 실록을 편찬하여 그 끝이 있게
하라"고 명령하여 이를 허락지 않는다.
드디어 김종서는 2월 20일에 새로 지은 "고려사절요" 32권을 문종께
바치는데, 이때 김종서가 감춘추관사를 겸임하고 있었으므로 그 전문 역시
김종서가 지어 바친다.
그리고 2월 22일에는 "세종실록" 찬술을 시작하면서 김종서는 황보인
정인지와 함께 총재가 되어 감수의 책임을 맡게 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9일자).
에 즉위하게 된다.
이때 김종서는 평안도에서 세종의 부음을 듣고 주야로 달려서 서울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서 문종이 즉위하고난지 이틀만에 서울에 당도하여 세종의 영전에
통곡으로 귀경을 보고드리게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자신의 충성과 신의를 믿어주던 세종이 타계하였다는
사실은 김종서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다행히 새로 등극한 문종 역시
세종의 뜻을 잘 헤아리고 있었기 때문에 김종서에 대한 믿음이 거의 절대적
이었다.
김종서도 그런 문종의 신뢰감에 보답하기 위해서 4월 20일에는 변방 방비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장문의 상소로 개진하여 각 주군의 요해처에 성을 쌓아
야선군의 침입에 대비할 것을 간절히 요청하게 된다.
영의정 하연을 비롯하여 좌의정 황보인 등이 야선의 목적이 중원 정벌에
있으니 우리나라를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를 반대하지만 김종서는
"하루아침에 적의 기병이 압록강에 이른 연후에야 비로소 도모하려
하십니까"하고 사전 방비가 최선책인 것을 강조한다.
김종서를 굳게 믿어 국경방비의 전권을 맡겼었던 세종의 옛일을 잘 알고
있던 문종은 이 논의에 있어서 결국 김종서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다.
그리고 그동안 김종서의 노고를 포상하기 위해 7월 6일에는 김종서를
정일품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으로 승진시키니 우찬성 자리를 지킨지
5년만에 이루어지는 승진이었다.
이때 좌찬성 박종우는 실직을 박탈당하고 품계만 한등 올려 성록대부로
삼고 있다.
겸해서 김종서는 9월 1일에 지경연사가 되어 임금의 학업을 돕는 경연의
총책임을 맡고, 12월 15일에는 아무래도 평안도가 불안하므로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어 평안도의 군비현황을 점검하러 다시 평안도로 내려간다.
이때 김종서는 그 장자인 김승규를 수행시키는데 영의정 하연 등이 68세의
노대신인 김종서가 삭풍이 몰아치는 평안도 변경으로 섣달보름날 국경방비를
점검하러 떠나는 것을 미안하게 여겨 이를 수행시키자고 건의하였고 문종이
이를 가납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김승규는 모친의 상을 당하여 복상 중에 있었는데 기복시켜 이를
수행해 가게 하였다니 김종서는 부인의 상을 당하고서도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이와같이 국사에만 전념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녕 멸사봉공의 화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종서는 평안도에 도착하여 정주목사 홍익생을 요동으로 보내어 적정을
탐문케 하는데, 문종 원년(1451) 1월 4일 홍익생은 야선과 탈탈불화 왕이
무수한 군대를 거느리고 불라출에 이르렀다가 야선 군대만 행방을 모르게
사라졌으니 우리나라로 향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다는 보고를 해온다.
이에 김종서는 급히 이 대비책을 강구하고 다시 통사 김신을 요동으로
보내어 적정을 탐문케 한다.
1월 22일 김신은 요동에서 탈탈과 야선의 동향을 보고하며 그 군대가 조선
으로 향할 것 같지 않다고 알려온다.
이에 문종은 계엄을 해제해도 좋으나 김종서의 판단에 맡기겠노라는 전지를
보내어 국경방어를 전적으로 김종서에게 일임하던 세종대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내외에 표방한다.
김종서는 문종의 이런 신임에 감읍하여 야선의 침공이 급박하지 않으리라는
판단아래 3월 13일에는 일부 방비군만 남겨두고 증원군은 모두 해산한 다음
상경한다.
얼음이 풀리면 북적의 도강이 어려워 침략 가능성이 희박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종서는 상경하고 나서도 군비강화책을 끊임없이 주장하니 6월
21일에는 활과 화살의 정비를 주청하고 6월 28일에는 함길도의 온성과 종성
및 평안도의 삭주와 용천의 읍성 축수를 서둘러야 한다고 아뢴다.
그런데 7월 1일 경연에서 도승지 이계전은 근래 성균관이 교화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여 인재를 제대로 교양하지 못하니 문덕이 높은 대신을
지성균관사로 임명해야 한다고 하며 김종서를 추천한다.
이에 문종은 "그렇다. 김종서는 본디 지춘추관사의 직책을 띠었으니 또한
성균관사를 맡을만 하다"고 만족해 하면서 김종서를 지성균관사에 임명할
결심을 하고 다음날인 7월 2일에 바로 김종서를 지성균관사에 임명한다.
성균관사를 맡은 김종서는 7월 28일에 대성전과 동무 서무 동재 서재의
비 새는 것을 모두 수리하고 난간과 담장 무너진 것도 보수하여 악기수장고
를 따로 짓고 각사에 파견되어 있는 양현고 노비를 쇄환하는 등의 일을
문종에게 주청하여 허락을 얻어낸다.
경연과 춘추관 성균관의 총책을 겸하였으니 김종서는 문한의 요직을
일신에 겸대한 셈이었다.
그러니 성균관의 대대적인 수리를 요청하는 김종서의 청을 어찌 문종이
들어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드디어 8월 25일에는 지춘추관사 김종서 등이 "고려사" 편찬을 끝마치고
새로 편찬한 "고려사" 1백39권을 바치면서 전문을 올리는데 당연히 그
전문의 찬자는 지춘추관사인 김종서였다.
그런데 현존하는 "고려사"의 전문에는 정인지가 그 찬자로 되어있다.
뒷날 정인지가 수양대군에게 빌붙어 김종서를 제거한 다음 김종서가 차지
하고 있던 자리를 모두 차지하고 나서 "고려사" 전문조차 그가 지은 것처럼
그의 이름으로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또한 문종은 이해 10월 27일에 김종서를 의정부 우의정으로 승차시켜
정승의 반열에 들게 한다.
황희에 뒤이어 세종 31년(1449)부터 영의정에 올라 있던 하연이 76세의
고령으로 치사를 청하자 문종은 즉각 이를 수락한 다음 김종서와 뜻을 같이
하는 좌의정 황보인을 영의정으로 하고 안평대군의 장자 의춘군 우직(1441~
53)의 장인인 우의정 남지를 좌의정으로 차례로 승진시킴으로써 실상
김종서 내각을 이루어 놓는다.
세종이 염원하였으나 미처 이루지 못하였던 정국개편을 문종이 단숨에
이루어낸 것이다.
자신이 병약하고 수양대군의 야심이 만만치 않은 것을 잘 아는 문종은
나이 어린 왕세자의 앞날을 걱정하여 김종서 내각으로 하여금 이를 지켜주게
하기 위해 이런 내각개편을 결행하였던 것이다.
우유부단한 하연이 영의정으로 있으면 유사시에 의정부가 수양대군을 제압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군마의 동원을 책임맡는 사복시 제조의 직책을 계속 김종서에게
맡기고자 하는데 의정이 되면 도제조로 직책이 높아져야 하나 사복시
도제조의 직제가 없다 하므로 부제조직을 신설하여 김종서의 심복인 조순생
(?~1454)에게 이를 맡기고 제조의 임무를 계속 겸대하게 하는 특전을 베풀어
계속 군마관할권을 장악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11월 1일에는 김종서가 도승지 이계전을 통해 의정이 되어
지춘추관사의 임무를 겸대하지 못하므로 "여사장편(고려사절요를 일컫는다)"
의 편찬을 거의 다 완성해가는데 이를 마음놓고 마무리지을 수 없다는 뜻을
임금께 아뢰게 하니 문종은 정도전의 전례에 따라 영춘추관사를 겸대하여
이를 마무리짓도록 하라는 특명을 내린다.
그리고 11월 28일에는 김종서가 명년에 나이가 70이 차게되므로 벼슬에
나오지 않겠다고 치사를 청하자 문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출사할
것을 명령한다.
그런데 11월 29일에는 성균관의 생원인 김안경 등이 김종서를 영성균관사로
삼아달라는 상소를 올린다.
그 내용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하늘이 낸 성명과 밝은 정치를 이어갈
만한 공경심으로 보위를 이으시고 날마다 경연에 나오시어 학교를 일으킬
방도를 강구하시다가 좌찬성 김종서에세 특명으로 지성균관사를 겸대하게
하여 학교의 책임을 맡기셨었습니다.
종서는 학문이 경학과 사학에 통달하고 도덕과 문장이 모범을 삼고 본받을
만 하여 가히 진신의 영수요 사림의 표준이라 일컬을 수 있습니다.
명령을 받은 이래 성상께서 위임하신 막중한 임무를 저버릴까 두려워하여
생각을 두루 하지 않음이 없었고,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사문
을 일으키는 것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았기 때문입니다.
신 등은 안색을 살피고 덕을 생각함에 우러르기를 태산과 북두와 같이
합니다.
이제 우의정으로 뽑아 올렸으나 영성균관사를 겸한다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 신 등이 생각하기로는 종서로써 성균관일을 겸하게 하면 장차
사문에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성인의 덕으로서도 달로 기약해도 좋다 하였으나 3년만에 이루었는데
하물며 인재를 만들어내는 것이 대체 어찌 일조일석에 능히 반드시 해낼 수
있겠습니까.
그 임직에 오래 있은 연후에 그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 등의 미친 듯 어리석은 죄를 용서하시고
신 등이 학교를 일으키려는 정성을 가련히 여기시어 특별히 유음을 내리시어
종서로 하여금 우의정으로 영성균관사를 겸하게 하시면 오직 학교를
이어가는데 다행일 뿐만 아니라 성세에 문풍을 숭상하고 교화를 일으키는
정치에 상당한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2월 2일에는 "세종실록"을 편찬하는데 이를 감수하는 사람이 모두 세종조의
대신들이라 사관들이 이들의 눈치를 보느라 직필하지 못한다는 여론에 따라
사초를 보관해 두었다가 수십년 지난뒤에 이를 바탕으로 실록을 편찬하자는
의논이 있게 되니 김종서는 "세종실록" 편찬의 감수를 사양하면서 실록
편찬은 대신이 담당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그리고 2월 6일에는 연로한 이유를 들어 "세종실록"을 편찬하는 일의
감수를 사양한다.
이에 문종은 "무릇 일이란 모름지기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경은 세종의 옛 신하가 되었었으니 이미 시작이 있었다. 이제
세종의 일이 이미 끝났으니 경은 마땅히 실록을 편찬하여 그 끝이 있게
하라"고 명령하여 이를 허락지 않는다.
드디어 김종서는 2월 20일에 새로 지은 "고려사절요" 32권을 문종께
바치는데, 이때 김종서가 감춘추관사를 겸임하고 있었으므로 그 전문 역시
김종서가 지어 바친다.
그리고 2월 22일에는 "세종실록" 찬술을 시작하면서 김종서는 황보인
정인지와 함께 총재가 되어 감수의 책임을 맡게 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