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공회의소가 뭐하는 곳이지"

일반인들에게 상공회의소는 낯선 곳이다.

특별히 접촉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저 특정지역의 상공인들이 모여 친목을 도모하는 단체려니하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유럽연합(EU)상공회의소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EU상공회의소는 한국정부에 아주 강력한 압력단체다.

정부의 대외통상정책에 대해 곧잘 "우리(유럽)의 입장"을 밝혀
정책입안자들을 껄끄럽게 만든다.

또 브뤼셀의 EU본부에 한국의 정책을 분석, 보고함으로써
국제협상테이블에서 한국에 대한 EU의 공격예봉을 한층 날카롭게 해준다.

올들어 EU상공회의소 관계자들은 더욱 분주하게 과천의 정부부처를
들락거렸다.

한국의 소비재수입 억제움직임과 관련해 한국정부가 직접 개입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며 대응책마련에 나섰다.

특히 국내 수입위스키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영국과 수입자동차시장에서
큰 몫을 차지해 온 독일은 한국의 소비억제캠페인에 강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의 대외무역적자가 확대,"허리띠 조르기"가 본격화되면서
정부의 한 유럽담당관리는 "유럽국가들의 대사와 잇따라 만나 거센
항의를 전달받았다"고 실토한 바 있다.

이쯤되면 EU상공회의소가 단순한 친목단체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감지하게 된다.

EU상공회의소는 다른 주한 외국상공회의소와 함께 대북교역을 위한
준비작업에 착실한 기관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지난해 북한이 미국 일본과 연쇄접촉을 벌이면서 개방적 자세로 나오자
북한위원회를 구성, 자료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EU상공회의소는 위원회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시스템을 갖고 있는
곳이다.

북한위원회는 유럽기업들이 북한에 진출할 때의 유의사항, 투자유망분야,
북한관리들과의 접촉방법, 예상되는 애로점등 매우 실무적인 정보들을
회원들에게 나눠주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장 자크 그로하 EU상공회의소 이사는 국내외에서 찾아보기 힘든
북한전문가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북한에서 7년이란 세월을 보냈던 그는 평양의 외국문출판사에서
"평양타임스" "김일성전기" "주체사상해설"등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바있다.

외국인과 언론사특파원을 제외하고 북한에 거주하는 외국민간인이
서너명에 불과하던 시절 북한생활을 경험한 관계로 "실전경험"을
갖춘 북한전문가로 꼽힌 것이다.

이같이 발빠른 대응태세는 웬만한 한국의 대기업들도 역량의 한계등으로
갖출수 없는 부분이다.

북한위원회의 설치는 EU상공회의소가 국내에 진출한 유럽기업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압력단체를 넘어 필요한 사업정보를 제공하는 기관으로까지
성장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좋은 사례다.

주한EU상공회의소는 설립된 지 10년을 넘기면서 한국과 EU의 무역.산업
관계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EU상공회의소가 정책을 제언하는 기관으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EU상공회의소의 설립목적은 양쪽의 무역산업관계를 개선,
발전시키는데 있었다.

특히 EU기업을 위한 교섭창구로 한국에 진출한 EU기업의 활동을
저해하는 문제를 제기,이에 대한 입장을 문서화해 정기적으로 발표하는
일을 해왔다.

과거 한.EU의 무역볼륨이 크지 않았을 때는 이같은 입장표명내지
문제제기가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않았다.

그러나 양쪽의 무역규모가 범세계적인 추세였던 경제의 글로벌화와 더불어
크게 불어난 상황에서는 평가절하될 수없는 무게를 갖게 된 것이다.

실제로 과거 10여년동안 EU의 대한국정책, 한국의 대EU정책중 상당수는
주한EU상공회의소에서 작성된 자료를 "진원지"로 해서 정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의 활동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