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아무개가 장편소설을 출간하였다.

얼마 뒤 몇몇 문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 그 작품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그것을 읽었다는 문인 하나가 선뜻 대답했다.

그거 재미없더라.

곧이어 옆에 있던 다른 문인 하나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 그거 정말 재미없더라.

그렇게 두명이 연해 재미 없다고 하자 그것에 대한 얘기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재미없는 것이라면 더이상 언급할 가치도 없다는 걸 모두가 묵시적으로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적어도 필자가 겪은 바로는 70년대와 80년대에는 문학작품을 재미 위주로
평가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거칠게 말한다 해도 그 시절에는 작품이 "좋다" "나쁘다"라고
평했었지 "재미있다" "재미없다"라고 평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90년대로 접어든 이후 상황은 완연히 달라졌다.

출판에 관계하는 사람들의 뇌리에 "재미"라는 망령이 들러붙고, 이윽고
그것은 작가들의 의식까지 점령하여 "재미=작가의 존망" "재미=소설의 존망"
이라는 끔찍스러운 등식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재미의 망령에 점령당한 분야가 비단 문학판만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고 느낌을 유발하게 만드는 모든 대상, 모든
분야로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

한 편의 영화에 대하여, 한 편의 드라마에 대하여, 시청률 전쟁터로 변해
버린 방송사들의 각종 쇼 프로그램에 대하여, 심지어는 인간에 대하여
재미의 망령은 새로운 선악의 척도처럼 무차별하게 적용되고 있다.

적용될 뿐만 아니라 재미 없는 것은 간과되고 도외시되고 또한 배척당한다.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다.

재미란 즐거움과 흥미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당연히 웃음을 동반하게 된다.

영화와 드라마가 코미디 같아지고, 거개의 쇼 프로그램이 억지스런 웃음을
쥐어짜게 만드는 광기의 난장 같아지고,토크 쇼에 출연하는 사람들의 언행이
개그맨을 닮아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보면 여기서도 웃음, 저기서도 웃음, 도처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의 바다 위에서 우리 모두가 대책없이 난파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섬뜩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웃음은 삶의 풍요로움과 여유를 반영하지만 웃음을
무차별하게 상품화하려는 자본의 파행성은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상실
하게 만든다.

그리고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의 결여는 도덕적 불감증과 직결될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전망을 불투명하게 만든다.

개탄에 개탄을 거듭해도 시원찮을 청문회장에서도 개그를 방불케 하는
언사와 폭소가 터져 나오고, 그것을 보는 시청자들은 청문회가 아니라
한판의 쇼 프로를 보는 듯한 어처구니없는 재미에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게
된다.

물론 슬프거나 고통스런 인생보다 재미있는 인생이 훨씬 낫다.

하지만 그때의 재미는 자기 삶에 대한 성실한 투자와 진지한 노력에 대한
대가로서의 흥미를 일컫는 말이다.

정치하는 재미가 떡값 챙기는 재미가 아닐테고 예술하는 재미가 영혼을
팔아 돈과 맞바꾸는 재미가 아닐 터이니 더이상의 언급은 사족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인생의 참다운 재미는 외부에서 얻어지는게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발견
되어져야 하는 것, 무분별하고 무차별한 상품을 통해 얻어지는게 아니라
건전한 삶의 결실로 자연스럽게 얻어져야 하는 것이다.

재미에 대한 무반성적인 추구와 그것에 대한 잘못된 이해 속에서 정작 깊이
병들어가는 대상은 이 나라의 청소년들일 것이다.

그들이 오직 재미있는 것만을 우선시하고 재미 없는 것을 "밥맛"으로 치부
하는 풍조에 무서운 암시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사물뿐 아니라 사람까지도 "밥맛"으로 치부하는 끔찍스런 시대가
도래하지 않으리라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으랴.

지금은 우리 모두가 부질없는 재미에서 깨어나야 할 때, 잃었던 진지함을
냉정하게 회복해야 할 때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