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느냐 먹히느냐"

디지털TV의 등장으로 컴퓨터업계와 TV업계간 사활을 건 한판대결이
불가피해졌다.

PC와 TV기능을 동시에 갖춘 멀티미디어제품 개발이 가능해지면서 양쪽
진영이 상대방의 고유영역을 넘보게 됐다.

TV기능을 갖춘 PC가 시장을 선점하느냐,PC기능을 겸비한 TV가 시장을
주도하느냐.

이는 TV나 PC 둘중 하나는 사라진다는 의미다.

지난달 7일 미국 PC업계는 TV업계에 대해 전면전을 선포했다.

소프트웨어 마이크로프로세서 PC부분에서 선두업체로 꼽히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MS), 인텔, 컴팩등 3사는 PC로 디지털방송을 시청할 수 있는
표준기술을 공동 개발키로 했다고 공표했다.

일단 힘을 합쳐 외부의 적부터 격파하자는 계산이다.

TV업계도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는 마찬가지.

소니, 필립스, 마쓰시타, 도시바등 유력 가전업체들도 PC업계보다 조금
앞서 인터넷TV, 디지털비디오디스크(DVD)기술을 공동화하기로 합의했다.

물론 회사별 각개전투도 병행한다.

자체기술개발이나 기업인수합병을 통해 제품개발에 나서고 있다.

MS사의 경우 지난달 TV에서 바로 인터넷에 접속할 수있는 시스템을
판매하는 웹TV네트워크사를 인수했다.

빌 게이츠 MS 회장은 "웹TV를 인수한 것은 디지털방송과 인터넷의 혜택을
소비자에게 나눠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양진영의 사생결단이 시작된 근본적인 이유는 디지털방송의 출현이다.

방송과 PC가 동일한 방식으로 정보를 전송하게 되면서 둘을 하나로 묶을
수 있게 된 것.

또 이 시장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인식도 한몫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디지털방송이 시작되는 2001년부터 10년간 2천만대(20조원)의
디지털TV 수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특히 관련 소프트웨어 시장은 그야말로 노다지라는 평가다.

빌 게이츠회장이 노리는 것도 바로 이부분이다.

양쪽 진영의 결전에 임하는 소감을 들어보자.

먼저 PC업계.

"TV생산업자들은 결코 PC생산업자만큼 디지털TV수상기를 판매할 수 없을
것이다"(빌 게이츠 회장)

다음은 TV업계.

"소비자들은 결코 TV를 부팅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수시로 다운되는 것도 참을 수 없다"(게리 샤피로 미국가전제품생산협회장)

설전에서부터 상대방의 기를 완전히 제압하겠다는 기세다.

관전자들은 전초전에서 TV업계가 조금 유리한 고지를 탈환했다고 평가한다.

지난달 3일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가 디지털TV의 송신방식을
비월주사방식으로 최종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는 현행 TV수상기가 사용하고 있는 방식으로 PC와는 호환성이 없다.

PC업계는 빌 게이츠 주도하에 FCC가 PC와 호환가능한 송신방식을
채택하도록 적극 로비했지만 일단 판정패했다.

그렇다고 기죽을 PC업계는 아니다.

PC업계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저력을 가진 집단.

최근들어 PC업계는 수십가지 디지털TV생산 계획을 잇달아 발표하고 있다.

이에 부응, 프로그래머들도 멀티미디어 소프트웨어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비로소 탐색전을 끝내고 접전을 시작한 것이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라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상당기간 절대승자가 나타나기 힘들 것으로 전망한다.

개별회사들이 어느 한쪽 진영에만 서서 싸우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상때문이다.

적과의 동침도 서슴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벌써부터 이런 조짐은 나타나고 있다.

TV 오디오 비디오 전문업체인 소니는 PC도 생산하기 시작했다.

경쟁자인 MS가 인수한 웹TV의 장비도 생산한다.

PC업계와 TV업계중 어느 쪽이 이겨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PC생산업체인 아세르아메리카의 마이클 컬버 부사장은 "어느 누구도
혼자서는 디지털 혁명을 주도할 수 없다.

어떤 형태로든 서로 부대끼고 의지하면서 혁명을 이끌어 나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 조성근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