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국민연금제도를 전면 손질하기로 한 것은 "예정된 파산"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는 지난 88년 국민연금 제도를 도입한 뒤 내년 도시자영업자 연금
실시를 끝으로 전국민 연금을 실현하겠다는 스케줄을 짜놓았다.

그러나 국민연금제도는 도입 당시부터 졸속행정의 대표적 작품이라고
비판받았던 데로 10년도 못버티고 절벽끝으로 몰렸다.

그러니까 "땜질 처방"의 한계에 부딪친 정부가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인 셈이다.

사실 국민연금은 지금의 제도 아래선 2033년께 파산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지적돼 왔다.

제도를 도입한지 20년이 되는 2008년부터 보험료로 내는 돈보다 연금으로
내는 돈이 많아지게 된다.

적자가 누적되다가 오는 2033년에는 완전히 바닥을 드러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국민연금의 파산은 제도적으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도록 돼 있다.

한국의 보험료는 현재 월 소득의 6.0%이다.

내년부터는 9.0%로 오르지만 일본은 월소득 17.35%보다는 훨씬 낮다.

독일 18.6%에 비하면 반도 안된다.

그렇지만 연금은 상대적으로 많이 받는다.

연금으로 받는 돈은 서로 비슷하지만 한국에서는 60살부터 연금을 탈 수
있도록 돼 있다.

독일이나 일본(65세)보다 5년 먼저 연금의 혜택을 받게 되는 것.

정부가 연금운용을 마치 사금고처럼 이용한 것도 재정악화를 가속화한 한
요인이다.

예를 들어 증시가 침체되면 증시부양을 위한 돈으로 연금이 뿌려졌다.

이자율이 금융상품보다 훨씬 싼 공공부문에 연금의 68.1%가 투자되고
있다는 현실이 정부의 방만한 기금운용을 증명하고 있다.

최근에는 정부일각에서 연금을 통화조정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는 얘기마저 들린다.

결국 국민연금은 정치적 이유로 제도상의 허점을 안고 출발한데다
운영상의 부실마저 겹쳐 빈사상태에 빠져버렸다.

정부가 늦게나마 제도를 뜯어고치기로 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보험료가 올라가고 연금을 탈 수 있는 나이가 늦어질 게 뻔하다.

그동안 돈을 꼬박꼬박 내온 기존 가입자의 거센 반발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또 신규가입자와 기존가입자사이의 형평성 문제도 많은 논란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또 국민연금에 한 국민들의 불신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앞으로
정부가 제도 운용에 상당한 부담을 갖게 될 것으로 보인다.

부실한 운영으로 비판을 받았던 정부가 스스로의 약속마저 깨버림으로써
신뢰성을 상실한 것.

사실 도시자영업자 등 소득이 불분명한 사람에게 연금을 적용하기 위해선
가입자들의 성실한 소득신고가 전제돼야 한다.

연금을 운용하는 사람과 가입자간에 "신사협정"이 맺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부가 먼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꼴이니 가입자에게 신사도를
발휘하라고 요구하기도 어렵게 돼 버렸다.

결국 그동안 제도상의 허점을 방치하다가 망신을 자초한 정부나 복지
국가의 꿈을 "부도난 희망"으로 바꿔버린 국민이나 모두 상처를 입게된
셈이다.

< 조주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