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일청 <에스콰이아 문화재단 이사장>

최근 일본 "엔"화 가치의 평가절상이 진행되고 수출신용장 내도 액이
근소하나마 증가세로 나타나 수출이 회복되는 기미가 보인다는 보도가 있자
성급히 경기 회복이 청신호 등의 표현이 신문 매체에 보도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우리 산업의 실상을 모르는 무책임한 언행이라 생각된다.

물론 지난 수년간 지속되어 온 경기 침체의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회복의 사소한 징조도 놓치지 않으려는 심정은 이해되나
대외환경의 변화를 계기로 국내 경기의 회복을 점치기에는 아직 이르다할
것이다.

과연 "엔"화 평가절상으로 경기가 회복되고 수출이 활발히 이루어져
그간 크게 걱정해 온 국제수지 적자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인가를
점쳐 볼 때 그렇다고 자신있게 답할 전문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

"엔"고로 일본을 비롯한 수출시장에서의 우리 상품의 경쟁력은 어느
정도 개선되겠지만 반대로 막대한 대일 무역적자를 보이고 있는 현실에서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는 제품이나 원자재 값의 상승 부담이 우리 경제와
기업에 적지않게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냉정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그간 계속된 고이금,
고금리, 고비용, 비효율 구조의 우리 경제 체질로 인하여 많은 수출주력
제품의 경쟁력이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이 여러나라에 이미
뒤져버렸는데 이제 다시 이를 회복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또한 "엔"화가 평가 절상되어 우리 제품이 해외시장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될지라도 그간의 우리나라 기업들이 이룩한 기술면에서나
경영면의 혁신이 미미하여 단기간내에 현저한 생산성 향상과 품질향상을
실현하지 못하여 "엔"의 평가절상에 따른 기회를 유리하게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일본은 2년전 "엔"화가 90원대까지 평가절상되었어도 기계, 전자
등 중화학공업제품의 수출이 여전히 무역수지 흑자의 큰 몫을 해왔다는
사실과 우리나라 기계공업 관계자들이 최근 대만에서 열린 기계 전시회에서
대만제제품이 품질과 가격면에서 우수함에 기가 꺾기고 돌아온 현실을
비교해 볼때 불황의 돌파구를 일본의 "엔"화 평가절상에서 찾으려는 생각은
어리석은 일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산업 자체가 지닌 그리고 산업 환경에
내재돼 있는 고질적인 병폐가 제거되지 못하였으며 제거에 시일이
걸린다는데 있다.

첫째로, 우리 민족이 지닌 낙관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자기 실력의
과신이 경영자로 하여금 낡은 기업경영방식과 관리 관행을 여전히 간직하게
만들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급속히 변화하고 있는 기업환경을 소화하지 못하여 현재의 우리 처지가
과거의 단순한 연장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 경영자가 적지 않으니
하루가 달리 변하는 오늘의 경쟁사회에서 적절한 대비책이 강구될 리가
만무하다.

수지개선의 막연한 희망을 안고 적자 수출을 계속하고 있는 기업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다.

여기에다 전문 경영인의 육성을 게을리한 많은 우리 기업에서 세대 교체를
내세워 큰 조직을 이끌고 갈 전문적 능력을 시험해 보지도 않은 채 젊은
2세들을 등장시켜 만용을 부리게 하니 발전은 고사하고 망하는 기업이
속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가히 지도자 결핍에 따른 위기라 할 것이다.

둘째로, 선진국 대열에 동참하겠다고 OECD에 가입한 처지이면서도
경제운영의 제도나 규칙은 여전히 미개국의 폐쇄적이고 관료위주의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고질적 병폐의 문제이다.

예를들어 불합리한 금융제도와 관행에 대한 논의가 수십년 계속되었어도
아직도 개혁은 커녕 개선다운 개선도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만연되고 있는 불신, 기승을 부리는 부패, 낮은 기업간
협력관계 등을 평가해 볼 때 발전한 산업사회로 진입하기에 너무나
거리가 먼듯하다.

이점에서 우리 기업은 경쟁력이 강화되기가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으며
정상화 저해의 위기라 할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해 보면 현재 경영을 지탱하고 있다해도 가까운 장래에
도산이 예상되는 기업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부도업체 수는 줄지 모르나 그 규모는 결코 줄지 않을 것이다.

최근에 문제되고 있는 소위 재벌업체들의 도산이 이를 잘 말해준다.

더욱 가혹해 지는 경쟁환경하에서 기업 스스로의 능력과 위치를
경영자들이 올바로 파악치 못하고,이에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전략을
펼쳐 나가는 지혜와 과단성을 지니지 못한 기업이 살아 남는 요행을
이 이상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비극은 은행들을 비롯해서 달라진 환경에 적응 못하는 기업들
처리에 아직도 많은 정력가 자원을 쏟아 부어야 한다는데 있다.

몸체가 크다는 것이 짐이 되고 수익성 없는 기업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우리 경영자들이 깨닫기 시작했으나 때는 이미 늦은 기업이
많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늦었지만 기업들은 살기 위해 근본적이고, 과감하고도 요의주도한 대책을
마련할 때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