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머가 기업들을 죽이고 있다.

한보의 부도사태가 몰고온 금융기관들의 몸사림 현상에다 이제는 밑도끝도
없는 "금융대란설" "부도위기설"이 횡행하며 건실한 기업들마저 멍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루머는 이제 어느 개별기업의 문제만이 아니라 경제계가 공통으로
대처해야 할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루머의 폐해와 생성과정, 그리고 기업들의 대처방안 등을 점검해 본다.

< 편집자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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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의 금융시장에는 루머라는 이름의 악령이 허공을 방황하고 있다.
이 악령에 걸려들면 대기업 중소기업 가릴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희생되고
만다"

D그룹의 자금담당인 L상무는 요즘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금융대란설"의
가공할만한 폐해를 이렇게 표현한다.

사실 우리 경제계에 금융대란이라는 용어는 그리 낯설지 않다.

지난 93년 금융실명제가 전격단행됐을 때도 10월 금융대란설이 꽤 설득력
있게 나돌았었다.

어음의 회전기간 등을 감안할 때 실명제단행후 2-3개월부터 연쇄부도사태가
빚어질 것이라는 설이었다.

하지만 이때의 금융대란설은 설로서만 끝나고 그리 큰 피해를 낳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보와 삼미그룹의 부도사태를 계기로 금융대란설이 되살아났다.

특히 최근에는 진로와 대농그룹에 대한 부도방지협약을 계기로 그 위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담보없이 신용대출을 위주로 하는 종금 신용금고 등의 경우 부도방지협약이
발동되면 채권회수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 어지간히 탄탄한 거래선이 아니면
대출금을 조기상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2금융권은 부도방지협약이후 4조3천억원을 회수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같은 현상으로 인해 요즘 나돌고 있는 소위 6월 금융대란설에는
1백대기업에 드는 기업만도 20여개 업체들이 부도가능기업으로 거명되고
있다.

이중 대부분이 S그룹 G그룹 N그룹 등 소위 "잘 나가는" 중견그룹계열사들
이고 개중에는 10대그룹에 속한 기업들도 있다.

이런 밑도 끝도 없는 루머가 기업에 미치는 피해의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발생한 해태그룹의 자금악화설 해프닝이다.

유료증권정보회사인 한국증권방송이 지난 21일 자동응답전화서비스에
"해태그룹이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부도방지협약에 가입을 신청했다"는
정보를 띄워 해태그룹 계열사 주가가 폭락한 것이다.

이에 해태그룹은 문제의 한국증권방송대표 김상우씨를 허위사실 유포혐의로
당국에 고발했다.

또 지난 4월 부도를 낸 교하산업도 부도루머의 대표적인 희생자였다.

이 회사는 전세계 방수포시장점유율이 35%에 달하는 유망 중소기업이었는데
한보철강 부도직후 거래 금융기관들이 일시에 1백억원 이상의 자금을 회수
하는 바람에 부도를 내고 만 것이다.

특히 이 회사의 경우는 원료를 공급하던 거래선이 갑자기 현금결제를 요구
해온 것도 부도를 낸 주요인이어서 부도설이 비단 금융창구에서만이 아니라
상거래에서도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3월에 이어 또다시 부도위기설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뉴코아그룹도
이와 비슷한 경우다.

이 회사는 지난주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에 3백억원의 추가자금을 신청
하면서 참고자료로 다른 금융권과의 여신거래계획도 제출했는데 이것이
와전돼 1천6백억원 긴급자금 지원요청으로 둔갑됐다.

때문에 뉴코아그룹은 지난 22일 하루종일 업무가 마비될 정도의 대소동을
겪었다.

게다가 이 회사와 거래하고 있는 납품업체들에서 거래를 회피하는 움직임
까지 보여 일파만파로 피해를 입고 있다.

실제로 백화점용 설비를 납품해온 모 업체에서는 뉴코아의 거래은행 등에
공사대금 회수가능성을 은근히 타진한 것으로 알려져 뉴코아측을 당혹케
했다.

< 임혁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