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바쁜하루를 허둥대다보면 문득 저간의 우리네
삶이란 여간한 아이러니가 아니구나 싶을때가 있다.

바쁘게 시간을 쪼개로 열심히 일하는 것도 결국은 우리의 삶을 보다 기품
있고 윤택하게 가꿔가기 위한 수단이요, 방편에 불과한 것일텐데도, 요즘
같이 촌시를 다투는 우리의 일상은 도무지 삶의 질이요, 가치요할 겨를도
없이 주객이 바뀌고 본말이 바뀌어도 한참 바뀐 형국이 아닐수 없다.

그만큼 저간의 우리네 생활이란 너나없이 쫓기고 몰리며 숨가쁘게 돌아간다.

도대체 여유와 낭만이 자리할 틈새가 없고 멋이며 풍류며 시심을 얘기할
겨를도 없다.

부생공자망이라고 목표도 의미도 없이 공연히 분망한 일상적 메카니즘에
길이들고 인이 박히다 보니 이제는 아예 예술을 얘기하고 인생을 얘기하는
일 자체가 물정 모르는 후진 소리요, 촌티나는 한심스러움으로 치부되는
지경이기도 하다.

이쯤되면 본말이 바뀌어도 크게 바뀐 우리네 삶의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이같은 생활의 편의를 위해서 기계를 발명했지만 결국은 인간이 기계의
종속품으로 얽매어가고 있듯이 삶의 질을 위해서 열심히 뛰고 있는 요즘같은
자본주의적 산업사회에서의 부산한 생활구조도 삶의 질을 높여간다는 본래의
의도와는 멀리 우리들의 삶 자체를 무미건조한 기계적 분망함에 예속시키며
생기없는 무기물처럼 하루하루를 박제화시켜 가고 있는게 아닌지 모르겠다.

머리와 가슴이 바쁘고 손발이 편하던 저만큼 어제만해도 제법 낭만이
있었고 풍류가 있었다.

그러나 하루가 분초로 쪼개지며 손발만 바빠진 요즘은 여유와 낭만은 커녕
훈훈한 인정마져 메말라가고 있다.

깊은 사색의 머리작용이나 뭉클한 정서의 가슴작용이 손박의 부산함에
예속된체 점점 퇴화돼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같이 각박한 물질문명속에 무기력해지고 있는 우리네 감성은
도대체 아름다움을 만나도 아름다움에 감응하지 못할뿐더러 선악이나 옳고
그름을 보아도 무감각하기 일쑤이다.

그러면서도 무엇에 홀리고 무엇에 쫓기는지 어제도 오늘도 분망하기는
매한가지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제 이쯤에서 우리는 머리의 작용, 가슴의 속성을
되찾아야 겠다는 점이다.

손발의 분주함에 얽매여 녹슬고 퇴화된 가슴의 기능을 신록의 5월처럼
싱그럽게 되살려 내야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머리고 하여금 구름위를 나르게 하고 가슴으로 하여금
창공의 노고지리처럼 아름다운 대자연을 노래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환경파괴의 인위적 재앙에 찌든 우리의 영혼에 핏기가 돌것이고
그래야만 물질만능의 독기에 시들어가는 우리의 심성을 파릇파릇 되살려 낼
수 있을 것이다.

서초동 우면산 자락에 안겨있는 국립국악원은 그 외형적 위치안으로도
예사롭지 않은 상징성을 띄고 있다.

전면의 남부순환도로에는 언제나 차량의 행렬이 강물처럼 흐른다.

부산하고 기계적이고 매정하고도 삭막한 오늘날 우리네 삶의 축도이다.

그런가 하면 뒤쪽으로 펼쳐지는 우면산의 유순한 산자락에는 지금 5월의
신록이 한창이다.

''산절로 수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라듯이 모든 것이 무위자연 바로 그것
이다.

잔꾀도 억지도 없고 감언이설도 아비규환도 없다.

오직 물흐르듯 순리를 따르는 자연의 섭리만이 자리할 따름이다.

며칠전의 비탓으로 우면산의 녹색자락은 더욱 청초해지고 때마침 만개한
아카시아의 향기는 국악원 경내를 뒤덮어 온다.

예악당 우면당에서 울려오는 장중한 아악소리는 천고의 향훈을 더해주고
연습실 창틈으로 새어나온 은은한 가야고의 여운은 우리네 천길 마음속
심연으로부터 이끼 푸른 고래의 민족정서를 잔잔히 흔들어 깨우고 있다.

아무래도 국악원 울안 우면산 마루턱에다가 우리네 민화에서 보듯이
소타고 피리 불며 가는 신선상이라도 세워야겠다.

그래서 신선고개의 피리부는 신선상을 바라보는 시민들에게 국악의 소중함
은 물론 "만리귀선운외적"의 예술적 정감을 일깨워 준다면 우리네 삶은
그만큼 풍료로워지지 않을까 싶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