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김포공항이 가까워졌다는 아나운스 먼트를 들으면서 슬퍼지기까지
한다.

모든 사랑은 언제나 처음에는 첫사랑같이 열렬하고 가슴설레며 끝날 때는
모든 인생의 종말처럼 허망하고 의미없고 쓸쓸하다는 어느 시인의 에세이
처럼 그들은 끝날 것 같지 않은 그들의 사랑에도 언젠가는 종말이 올거라는
허허로운 생각을 하며 서울이 가까워옴을 안타까워한다.

"언제 만나죠?"

"전화하자구"

"아니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야. 나는 약속을 확실하게 하고 헤어지는
타입이라구. 자기가 나를 따라줘. 그래야 내가 불안하지 않다구"

그가 투정을 부리듯이 볼부은 소리를 한다.

그러자 그의 투정이 귀여워서 영신은 그의 푸른 수염이 까실까실한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따뜻하게 웃는다.

"전화로 연락하는게 더 정확하니까 그래요. 심술쟁이 도련님"

그는 철저히 버림받으면서 살아왔다.

그는 언제나 쫓기며 살았다.

아무 보장도 미래도 없는 청춘이었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는 늘 사랑에 굶주린 아이였다.

"내일 모레 저녁 사줘요. 우리 오피스텔 건너편에 한정식 잘 하는 집이
있어요. "고향집"이라구. 밥먹고 나의 오피스텔에서 놀다 가요. 여자라고는
와본 적이 없는 장소거든요"

그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는 정말 누구에게도 집을 가르쳐주거나 자기 거처로 데리고 간 적이
없다.

남자친구에게도 보안상 결코 비밀이 많은 자기 아지트를 가르쳐준 일이
없다.

"내가 처음이라구?"

"그렇대두요. 와 보면 알아요. 이래봬도 깔끔하게 해놓고 살아요. 남자
친구들은 술마시고 담배피우며 밤에 찾아오는게 싫구, 여자들에겐 집을
가르쳐주면 큰일 나요. 주책스레 찾아오니까 절대 사절이었다구요.
영광인줄 알아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황송하다는 표시를 한다.

지코치는 그녀의 겸손하고 우아한 매너가 언제나 마음에 든다.

잘 웃는 것도 좋고, 상냥하게 머리를 빗겨주는 자상함도 좋고, 그녀가
쓰는 크리스천디오르 향수도 정말 마음에 든다.

그녀와 헤어지는 것이 정말 싫다.

겁나고 외로워진다.

"정말 누나와 헤어지기 싫어"

지영웅이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하자, "어려서 나는 어느 화가의
그림을 꼭 갖고 싶었어. 아버지를 졸라서 호되게 비싼 그의 그림을 샀어.
그리고 내방에 걸어놓고 매일 감상하며 행복해 했지. 그러나 지금 나는
그 그림이 내방에 걸려 있는 것조차 잊고 지내거든. 사랑도 그런 것
아닐까? 우리 사랑만은 안 그랬으면 하지만..."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