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현모는 백 사람의 교사에 필적한다는 말이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흔히 맹모삼천지교의 고사를 든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의 교육 환경을 바꿔 주고자 세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일화다.

공동묘지 근처에서 시장 근처로, 또 다시 한교 근처로 옮김으로써 맹자를
성인으로 만드는 기틀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한국에도 맹자의 어머니처럼 편모로서 아들 교육에 현명함을 발휘한
일에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도 조선조 중기의 명필인 석봉 한호의 어머니가 남겨준 교육
일화는 남다른바가 있다.

떡장수로 가계를 이어가고 어머니가 어늘 날 밤 등잔불을 꺼놓고 자신은
떡을 썰고 아들로 하여금 글씨를 쓰게 하는 시합을 하여 이김으로써
아들을 분발시켜 명필로 길러 냈다는 내용이다.

석봉 (1543~1605)은 개성에서 군수 대기의 5대손, 정랑 관의 손자로
태어났다.

1567년 (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한 뒤 사헌부감찰 가평군수 흡곡현령을
지냈고 사후에 호조참의를 추중 받았다.

그러나 그의 우뚝한 발자취는 한국서예사에 획을 그은 석봉체는 서풍
확립에 있다.

석봉체는 중국의 왕희지체 등의 옛 서체법을 바탕으로 부단한 학습과
노력을 통해 이룩된 독특한 서풍이다.

그 두드러진 특징은 숙련된 필체의 강경.단정함이다.

특히 그는 국가의 주요문서와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사자관의 효시로서
후대 사자관의 사표가 되었고 또 그것은 직업서예가의 영역을 구축한
첫 케이스였다.

석봉체는 조선조 중기의 서풍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583년 왕명으로 쓴 "해서천자문"이 간행.반포된 이후 석봉체는 왕을
비롯한 왕실 고관에서 학동에 이르는 모든 계층의 서체에 널리 전파되었던
것이다.

또 그의 글씨는 중국에도 알려져 절찬을 받았다.

정부는 6월을 "석봉 한호의 달"로 정하고 전국 곳곳에서 그를 기리는
행사들을 펼친다.

한국서예사에 남긴 그의 예술적 혼이 활짝 피어 났으면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