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은 색깔을 가져야 한다"

디자인업체인 C&C(크리에이티브&커뮤니케이션) 디자인그룹사가 표방하는
기업이념이다.

여성의 손눈썹 고데기 하나 전자수첩 하나에도 제품 디자이너의 혼을 담아야
한다는게 이들의 고집.

"F A 포르쉐"가 레이싱카의 대명사로 통하고 "루이지 꼴라니"가 곡선의 미학
을 자랑하게 된 것도 그들만의 독특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추구했기 때문
이다.

아직 우리에겐 그것이 모자란다.

미국과 유럽 일본의 디자인을 흉내내기에 급급하다.

디자이너로서 독특한 냄새를 풍기는 디자이너가 없다.

그래서 김석구(33) 사장과 7명의 동료는 할일이 많다.

26~35세의 젊은이들로 "소장파"라는 이름을 달고 한자리에 모인 것도 국내
디자인계에 새바람을 불러 일으키자는 의도에서다.

한달이면 3분의 1을 밤을 새우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풀지 못한 갈증 때문에 창조(크리에이티브)와 고객과의 대화(커뮤니케이션)
를 끊임없이 시도한다.

그러나 창업한지 4년이 되었지만 아직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다.

딜레마다.

이 꼬인 매듭을 푸는 것이 바로 성공의 열쇠다.

그러나 급하지는 않다.

원래 "끼"로 똘똘 뭉쳤기에 가능성이 무한하다.

"끼"는 프로의식이다.

프로의식은 바로 일에 대한 사랑이다.

김석구 사장과 유영두 김영수 양승호 실장 등 8명의 C&C 가족들은 일에
관해서만은 자신이 있다.

"디자인은 원래 정보 싸움입니다.

정보는 발로 뛰지 않으면 얻을수 없는 거죠.

또 정보 부족 상태에서 만들어진 디자인이란 생명력을 갖지 못하고 금방
사라집니다"

좋은 예가 있다.

C&C는 최근 모기업으로부터 "TRS(주파수공용통신) 단말기"를 디자인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기한은 45일.

이 일이 절차에 따라 완벽하게 마무리되려면 상품기획 의도를 파악하기
위한 광고주와의 미팅에서부터 시장조사, 제품 컨셉트 스케치, 아이디어
스케치, 본격적인 제품도안, 최종 모형제작까지 적어도 10단계는 거쳐야
한다.

특히 고객 취향과 시장동향, 경쟁사의 제품동향을 살피는 등 기본자료
조사만도 꼬박 열흘가까운 시간이 걸린다.

시간이 곧 "성공과 돈"인 초싸움이 시작된다.

사장과 직원이 정보의 "압박검색"에 나선다.

압박축구처럼 수비 공격할 것없이 정보검색에 투입된다는 뜻이다.

신문도 뒤적이고 PC통신망도 배회한다.

잘 나간다는 인터넷 디자인하우스들도 빠짐없이 체크한다.

그러나 간과할수 없는 것은 "대중"의 취향.

거리에서 만난 이들의 인상은 그대로 아이디어가 된다.

김사장이 가장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들은 말이나 느낀 인상, 견해를 곧바로
아이디어로 창출해야 한다는 것.

시티폰을 가진 대학생의 뒷모습에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아가씨의 단아한
모습에서도 "도구"와 "실용" "미"를 하나의 라인으로 막힘없이 연결시키는
디자이너의 "끼"가 발동해야 한다.

아직은 연매출 3억원대인 소규모 업체다.

그러나 원래 돈에는 관심이 없었다.

"Designed By C&C"로 알려질 그날 만을 기다리는 프로들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화장품용기와 전자라이터 광역무선호출기 등 1백여개가 넘는
제품과 기업홍보물을 디자인한다.

5년동안 시장에 내보낸 제품도 셀수 없이 많다.

김사장은 "슬그머니 시장에 나가 디자인한 제품의 판매동향을 물어볼 때는
겁이 난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판매원들이 "그 제품 디자인이 좋아 잘 팔린다"고 말할 때면
천군만마의 지원군을 얻은 듯하다.

광고주가 "디자인이 맘에 든다"는 전화만 줘도 일할 맛이 난다.

가끔은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일도 있다.

모든 직원이 "핏덩이"처럼 만들어 낸 제품이 "시장성"이라는 문제로 빛도
못보고 사장돼 버리는 때다.

이럴 때면 제품 디자이너와 김사장은 뒷골목 소주집을 찾는다.

작업 도중에 일이 무산되는 경우도 있다.

기획 자체가 변하거나 시장상황이 변해 마무리단계에서 없던 일로 되는
경우다.

힘이 빠지기는 하지만 이 정도도 한잔 소주로 넘길수 있다.

그러나 국내 제품디자인이 "무국적"이라는 말을 들을 때는 참을수 없다.

"색깔"있는 디자인으로 미래 세계 무역강국의 첨단에 서겠다는 의욕도
없이 편한대로 베끼기를 일삼는 기성세대가 얄밉다.

김석구 사장과 직원들은 오늘도 자정을 알리는 괘종소리를 듣지 못하고
일에 빠져 있다.

< 글 박수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