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라리온은 아프리카의 서남쪽에 있는 면적 7만1천7백40평방km,
인구 4백50만명의 소국이다.

남서쪽은 기니만, 북동쪽은 기니, 남동쪽은 라이베리아와 면해 있다.

15세기에 포르투갈인들이 이곳에 왔을 때 해안산지에서 울린 천둥소리가
마치 사람울음 같았다고 해서 사자산(사자산)이라는 뜻의 시에라리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국명의 유래가 그래서인지 이 나라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이래 그
걸어온 길은 험난하기만하다.

1788년 영국은 시에라리온 해안의 프리타운 (지금의 수도) 지역을
할양받아 북아메리카에서 이송된 해병흑인노예들과 대서양에서 나포한
노예선의 아프리카인들의 정착지로 삼았다.

영국은 1896년 시에리온 내륙지역도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1920년대부터는 시에라리온의 다수부족인 템네족과 벤네족을 주축으로
한 민족주의운동이 일어났다.

24년에는 입법심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고 51년에는 내륙의 보호령
출신인 밀턴 마게이가 프리타운과 보호령의 민족통일을 기치로 내건
보수적인 시에라리온 인민당 (SLPP)을 창립했다.

61년 4월27일 독립을 하게되자 마게이가 최대 총리가 되었다.

67년에는 총선에서 SLPD와 사회주의 노선의 전인민회의당 (APC)이 동수
의석을 차지해 무소속의 지지를 받은 APC당수 샤카 스티븐스가 공화제
정부 수립에 착수했으나 쿠데타가 일어나 민족재편평의회 (NRC) 군사정권이
수립되었다.

68년에는 NRC정권도 쿠데타도 무너지고 스티븐스가 총리에 취임해여
정치안정에 힘쓴 끝에 71년 공화제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비상사대 선포,야당 탄압및 불법화로 1당독재체제를
확립했다.

86년 선거에서도 그의 후계자인 조셉 사이드 모모를 대통령에 당선시켰다.

92년에는 또다시 군부쿠데타가 일어나 발렌타인 스트라세 대위가
국가통치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이 정권이 93년 민정 및 다당제 복귀 안정을 발표했는데도 쿠데타 시도를
비롯한 반란의 저항이 극심했다.

어찌할수 없이 지난해 2월 선거를 실시하여 아메드 카잔 카번흐 대통령
당선자에게 정권을 넘겨 주었다.

그런데 카번흐 민선정부도 지난 5월25일 쿠데타로 무너지고 급기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나이지리인 극도의 서아프리카평화기지로 이 헌정회복을 요구하면서
군사개입을 하고 유엔과 아프리카단결기구 (OAU)도 이를 적극 지지하고
있다.

검은 대륙의 이같은 정치적 악순화은 언제나 끝날지 안타깝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7일자).